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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Feb 06. 2023

2월 6일 월요일

출산휴가 4주차 마지막 월요일기. 아기방 커튼을 달았다.

1. D-5

출산을 5일 앞두고 아기를 만난다는 기쁨이 10이라면, 임신 초기부터 말기까지 이어지는 마음속 불안함은 여전히 5로 유지된다. 아기를 건강하게 잘 만날 수 있을까? 5일을 24시간으로 굳이 나누고 또 그 120시간을 1분 1초로 나누어 기쁨과 불안을 함께 느끼고 있다.


오늘로 37주 4일. 내 몸은 조금 더 가뿐해지고 아기의 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저 네이버에 '37주 태동감소'라는 검색어를 입력하기만 해도 비슷한 증상이 수십 개씩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몸의 변화는 낯설다. 예민하지 않게 굴려고 노력하다가도 일상과 일상사이 여전한 불안함이 올라온다. 아기를 낳아 내 품에 안고 숨소리를 들을 때까지 임신의 안정기는 없는 것 같다.


금요일 출산일로부터 20여 일간의 긴 외출이 시작된다. 출산가방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기도 하고, 남편의 속옷함과 화장실의 수건칸을 한 번씩 점검했다. 밥도 혼자 잘 챙겨 먹고, 청소도 정리도 곧잘 하는 남편이지만 웬만해선 세탁까지 할 부지런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남편을 위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서. 아마 이번주 내내 긴 여행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아기 침구류를 모두 세탁해 침대를 채워 넣고, 주말 사이 남편이 손빨래 해둔 아기 인형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요즘은 필수로 여겨지는 허리까지 오는 기저귀 갈이대도 미리 준비해 뒀고, 방수매트와 아기가 사용할 가장 작은 사이즈의 기저귀도 정리해 두었다. 복도 쪽으로 향해있어 어딘지 스산했던 아기방 창문에 긴 린넨 커튼도 달아주고, 어쩔 수 없이 못생기게 설치된 가전들 곁에 올해 달력도 한 장 붙여두었다. 이제 아기만 오면 된다. 부디 건강하게 만나자. 금요일에 봐!


2. 넷플릭스 태교

클래식 태교나 성경 읽기 태교 같은 뻔하지만 우아한 태교는 애당초 계획에도 없었다. 전종관 교수님이 태교 같은 건 워킹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회적인 시각일 뿐이라고 했고! 아침마다 르세라핌 노래를 부르며 출근하면 아기도 함께 꿀렁거리곤 했으니 그것도 꽤 현대식 태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님 말고.


출산휴가 내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넷플릭스를 끼고 산다. 그중에서도 최근엔 '웬즈데이'에 푹 빠져있는데 흑화된 캐릭터와 스토리 그리고 '안녕, 프란체스카'를 연상시키는 주인공의 가족들이 여간 웃긴 게 아니다. 한 장면 걸러 한 장면씩 피가 철철 나고 사람이 죽어나가기는 하지만 어쩐지 출산휴가 중에 딱 보기 좋은 8부작 시리즈라 별다른 대체 시리즈는 고를 마음이 없었다. 그러다가도 조금 따분하긴 해도 '웬즈데이'보다는 더 태교에 적합하려나 싶어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들도 한참 골라보았지만 그냥 내가 좋은 게 좋은 거다 싶어 웬즈데이 정주행 중. 게다가 출산 하루 전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너의 모든 것' 새 시즌 공개라는데 산후조리원에서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신이 난다. 아기 낳고 나면 넷플릭스도 사치라고 하니 나름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끝까지 달려본다.


3. 만삭사진

산후조리원은 대부분 얼리버드 할인이 있어 8주차에서 9주차에 예약을 진행한다. 조리원 예약하기엔 너무 이른 주수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전화통이 불나기 시작하는데 그건 바로 연계된 스튜디오의 만삭사진과 아기 성장앨범 계약을 위한 엄청난 영업 전화. 만삭사진은 배도 딱 예쁠 정도로만 봉긋하면서도 산모가 덜 뚱뚱할 때 찍는 게 국룰이기 때문에, 20주 전후로 주말 타임을 미리 선점하라는 전화가 빗발치곤 했다. 만삭사진은 뭐 원래부터 딱히 안중에도 없었고, 성장앨범도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불타는 고구마 신생아 시절의 촬영은 아무렴 나보다 전문가가 더 나을 것 같아 예약해둔 참이었다.


다만 점점 배가 불러오고 임신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 돌이켜보니 임신 기간 중 찍어둔 사진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같아 남편과 '연희동 사진관'에서 부부사진을 찍고 왔다. 8월 결혼기념일에 맞춰 매년 촬영하던 사진을 이제 2월 아기 생일에 맞춰 찍기로 했던 터라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지난 주말 말고는 도저히 사진 찍으러 갈 여유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출산을 일주일 남겨두고 가장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촬영에 임했을 뿐이었다. 사진사 선생님께서 "초산은 대부분 겁이 많아 1달 전에는 오시는데, 1주일 전에 오시는 분은 처음이다."라는 말씀을 남겨주셨을 정도로 사진 속 나는 퉁퉁 불어있었다.


발목과 발등까지 붓기가 올라와 이미 내 신발은 신지 못한 지 오래. 작년 남편 생일 선물로 사줬던 검은색 단화가 나에게 꼭 맞아 어쩔 수 없이 그 신발을 신고 촬영을 했다. 예쁘고 안 예쁘고를 떠나 기록으로 남기는 게 중요한 이른바 '만삭'이니 냉장고 앞에 가지런히 잘 붙여두었다. 꽉 채운 달, 만삭이 이렇게 지나간다.


4. 회식 같은 저녁식사

지난주 전 회사 선배의 영전 소식에 들떠 손님맞이를 강행했다. 물론 선배님이 장 봐오시고 선배님이 음식 하시고 선배님이 차려주신 걸 난 먹기만 했다. 물론 새벽 2시까지 기름때 벗기느라 조금 힘들어 감기로 고생하긴 했지만 만삭에 손님맞이와 술상 치우기를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마라탕도 훠궈도 못 먹는 내 남편에게 선배가 차려준 마라샹궈는 높아도 너무 높은 허들이라 거의 빈 속에 수정방과 소주 한 병을 마시곤 완벽히 전사해 버렸고 그다음 날 날 분노하게 만들었지만. 게다가 술이 오른 또 다른 선배가 블라인드를 뽀개먹었고, 같은 층 동대표 아줌마의 엄청난 눈초리를 견뎌내며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손님을 배웅해야 했지만 꽤 웃기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전 회사에서의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보낸 사람들과 그때 참 힘들었었지,라는 말을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무민같이 나온 배 위에 손을 얹고 소파에 기대어 시시덕거리는 나를 개의치 않고 몇 시간이고 계속 수다를 이어가는 아저씨들을 보는 것도 웃겼다. 집에 오는 언니들은 열이면 열 모두 다 부엌에 들어가 설거지라도 해주겠노라며 팔을 걷어 부치고 내 움직임 하나하나에 불편한 눈빛을 쏘아대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철없는 저녁식사였는지 알 수 있다.


감기로 한 주를 보내고 오늘 드디어 선배의 출근 첫날. 늦지 않게 화분을 보내려고 했는데 어쩐지 한 발 늦어버려 내일 오전에야 도착한다고 연락을 받았다. '중국어 능통 준비된 인재 드림'의 문구를 적으면서 혼자 피식 웃었다. 준비된 인재라니. 화분 받은 순간 피식하고 웃으면 화분의 도리는 다한 것.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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