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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Feb 20. 2023

2월 20일 월요일

엄마 데뷔 10일차에 쓰는 월요일기

1. 병 안에 든 기분

지난주 출산을 마치고 조리원에 들어와 바쁜 듯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문득 어떤 마음의 변화였는지 우울감에 휩싸여 삼일밤낮을 울다가 결국 남편이 연차를 쓰고 조리원에 조기입소했다.


우울감은 주로 물이 가득 찬, 주둥이가 아주 좁고 얇은 병 안에 쪼그려 앉아있는 듯한 답답함을 준다. 그래서 나의 어느 부분을 건드려도 눈물이 나고 한번 눈물이 나면 멈춰지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상태가 나아지면 그 작고 좁은 병을 바라보는 내가 된다. 그 병 안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아주 좁고 얇은 그리고 물로 가득 찬 유리병.


가장 힘이 들었던 어느 날, 눈을 뜨자마자 눈물이 났다. 냉수로 세수하고 양치하고 머리까지 곱게 감고 겨우 진정시켰지만 다시 눈물이 주체가 안 됐다. 속상한 마음에 남편에게 한바탕 쏟아내고 마사지받으면서 남은 눈물을 몰래 훔쳐내고 나왔는데 그 사이 남편이 조리원에 연락해 하루 일찍 입소할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해두었다고. 그 소식을 듣자마자 또 눈물이 터져버려서 족욕실 한 구석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한참을 울었다. 알고 보면 우울의 유리병 밖에 나와 있는 순간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늘 물에 잠겨있는지도.


우울한 이유를 묻는다면 말할 수 없다. 아니 말하기 어렵다. 그 순간은 한 가지 이유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러 감정 중 유난히 모난 것이 도드라져 터져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들어오고 하루종일 또다시 눈물이 났다. 남편은 나를 달래며 상담을 받아보자고 권했다. 이직 후 겪었던 우울의 파도도 그렇게 넘겼으니까, 이번 파도도 그렇게 넘겨보려고 한다. 만성으로 남지 않기를 그리고 가급적 얕고 짧게 흘러가기를 바라며.


2. 마스크

실내 마스크가 해제된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직 난 마스크를 벗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거절을 해야 하는 상황, 아무리 생각해도 반박 말고는 할 수 없는데 사정상 말을 얹기 어려운 상황, 표정관리가 쉽지 않거나 혼잣말을 내뱉고 싶은 여러 상황들에서 마스크는 꽤 유용했다. 아직 마스크 없이 외출해 본 적이 없어 와닿지는 않지만, 주위 사람들이 소소하게 환호하고 그 순간들을 즐기는 걸 보면서 약간의 해방감과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집에 사둔 작은 박스의 마스크가 마지막이 되려나. 꽉 채운 2년이었으니 오래 쓰긴 썼네. 마스크 해제 기념으로 립스틱 하나 사야겠다!


3. 홍콩

2013년 8월 홍콩에 처음 갔다. 물론 그전에 1박 2일 정도 아주 짧은 여행을 간 적이 있긴 했지만 ‘일하러 ‘ 그리고 ’ 살러 ‘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홍콩에서 지낸 8개월은 꽤 즐거웠다. 건성 피부에서 광이 나게 해 준 습한 날씨, 겨울 없이 줄곧 여름과 습한 가을이 이어지는 환상적인 계절, 도심 곳곳에 있는 수영장들과 열대 과일까지. 언제 어디서든 중국어나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되어 편하면서도 때로는 광둥어를 몰라 적당히 이방인 같은 순간들도 기억에 남는다. 물론 8개월 동안 밤낮으로 공항을 드나들며 출퇴근을 했고, 자정이 넘은 야심한 시간에 매번 공항버스에서 내려 전속력으로 달려 집으로 들어오곤 했지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경험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해는 오랜 친구였던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던 해이기도 해서 남편이 홍콩에 놀러 온 3박 4일간 먹고 싶었던 음식들도 많이 먹고 밤이고 낮이고 화려한 홍콩을 즐기기도 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여러 번 홍콩에 갈 기회를 만들어 24시간 스테이를 하거나 루프탑 바에서 술 한 잔 멋지게 하고 귀국하는 다소 과하고 럭셔리한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다. 우리에게 소중한 추억이 깃든 곳.


주말 내내 남편과 텔레비전을 끼고 누워서 홍콩 현지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데 당장 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홍콩만큼은 당장 비행기를 끊어 3-4시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 감았다가 뜨면 홍콩에 도착해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도 하고 딤섬도 먹고 페리를 타기도 하면서 하릴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언제쯤 가보려나. 아기가 좀 더 크면 같이 가볼 수 있으려나?


4. 조리원

산후조리원을 두고 모두 조리원 천국이라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수십만 원 상당의 돈을 내고 24시간 내내 아기는 신생아실에 맡겨두고 여유로이 마사지받고 족욕하고 끼니때마다 방에 가만히 앉아 삼시세끼 대접을 받기 때문에.


하지만 그 이면에 엄청나게 빽빽한 스케줄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아침 7시면 신생아실에서 걸려온 전화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 이후 3시간에 한 번씩 아기를 방에 보내겠노라는 연락을 받아야 한다. 물론 중간중간 거절하기도 하고, 마사지 일정과 겹치면 한 텀쯤은 넘기기도 하지만 여전히 3시간에 한 번 오는 전화에 응답을 해야 한다.


게다가 아침 1시간 저녁 1시간 반씩 정해진 필수 모자동실 시간에는 애가 자지러지게 울지 않는 이상 케어해야 한다. 안아주기도 하고, 재우기도 하고,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초첨책을 펼쳐 주기도 한다. 침대에서 간이침대로 옮겨보기도 하고 왼쪽 품에서 오른쪽 품으로 고쳐 안아주기도 하면서.


그 외에 유축도 해야 하고 수술 부위 연고도 발라야 하고 식사 후 약도 챙겨 먹고, 삼시세끼 식사 중간에 들어오는 간식도 먹고 너무 늦지 않게 잠도 자야 한다. 7시면 하루가 무조건 시작돼야 하므로. 이렇게 바쁜데도 천국이라니 집에 돌아가면 대체 어떤 삶이 펼쳐지는 걸까. 월요일기는 쓸 수 있는 걸까. 약간 기대되면서도 무섭다. 우선 마지막 일주일은 울지 않고 세련되게 잘 즐겨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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