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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y 09. 2023

5월 8일 월요일

어버이가 된 후 맞이한 첫 번째 어버이날의 일기

1. 어버이날

꽃도 케이크도 준비하지 않은 채 무방비 상태로 맞이한 어버이날은 참 오랜만이다. 엄마집에 하루종일 기생해 있으면서도 그 흔한 카네이션 하나 사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죄송스러운 아침. 아침부터 아기가 울어 달래고 나니 이제야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2014년 첫 직장에 들어간 뒤 맞이한 첫 번째 어버이날, 부모님을 괌에 보내드렸다. 종종 두 분이서 해외여행을 다니시긴 했지만 휴양지로의 자유여행은 한 번도 다녀오신 적이 없었던 터라 호텔예약부터 주변 맛집까지 잘 정리해 손에 쥐어드렸다. 물론 사회초년생의 월급은 넉넉하지 않았기에 호텔비도 여행경비도 대부분 부모님 주머니에서 나오긴 했지만 다녀오신 후 동네방네 소문내며 크게 기뻐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이후의 어버이날은 꽤 특별했다. 새벽 꽃시장에서 아주 큰 꽃바구니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고, 결혼 후에는 온 가족이 해외로 가족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최근 1-2년은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파인다이닝을 예약해 비싸고 양 적은 점심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올해는 그러니까 최근에 보낸 모든 어버이날을 통틀러 보았을 때 가장 쉬이 보낸 첫 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어버이날 오후 미리 예약되어 있던 상담을 받고 나서 아기가 낮잠을 자고 있으니 산책을 다녀오라는 엄마의 연락에 동네를 열심히 걸었다. 걷다 보니 동네 꽃집에 남아있는 작은 꽃바구니가 눈에 들어와 가격도 묻지 않고 바로 구입해 집으로 돌아왔다. 잠이 귀한 나의 작은 아기를 토닥이며 낮잠을 재우고 있던 엄마에게 그 뻔한 꽃바구니를 내밀었다. 엄마는 소녀처럼 너무 예쁜 걸 사 왔다면서, 이렇게 예쁘고 귀한 걸 비싸게 주고 사 왔겠다며 연신 기뻐했다. 그 모습이 나야말로 너무 예쁘고 귀해 그 장면을 어딘가에 녹화해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2. 햄버거

엄마와 함께 살면서 좋은 여러 가지 점 중에 가장 좋은 점은 바로 간식시간이다. 엄마의 직장은 두 곳이라서 한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집에 들러 나에게 온갖 귀한 간식을 넣어준다. 바쁜 날이면 아침 일찍 과일을 산처럼 깎아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고, 여유가 있는 날이면 주스부터 요구르트 그리고 빵과 과자까지 식탁 가득 챙겨주고 다시 직장에 돌아가기도 한다. 0살 먹은 손녀를 데리고 온 35살 먹은 딸이 뭐가 예쁘다고 삼시 세 끼에 간식까지 챙겨 먹이는지. (아 물론 엄마는 아직도 나를 우리 아기!라고 부를 때도 있다. 근데 밖에서는 좀 안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엄마가 수제 패티가 무려 2장이나 들어있는 햄버거를 가져다줬다. 싫어하는 당근이 패티 사이에 콕콕 박혀있었지만 엄마가 따뜻할 때 먹으라고 싸 온 정성이 감사해 눈 딱 감고 먹었다. 사실 오늘 햄버거가 정말 먹고 싶었는데 아기가 깰까 싶어 못 시켜 먹고 있었던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너무 맛있었는데 아기가 졸리다고 우는 통에 1/4 조각을 겨우 먹었지만 정말 맛있었다. 남은 햄버거는 남편이랑 오손도손 나눠 먹어야지.


3. BEEF

아기가 낮잠을 길게 자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낮동안 넷플릭스를 볼 짬이 생겼다. 할렐루야. 언제 이 여유가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동안 보고 싶었던 BEEF를 빠르게 정주행 했다. BEEF에서 표현한 한인 사회와 한인 교회에 대한 여러 클립들을 미리 접했던 터라 꽤 오랫동안 궁금했던 작품. 보고 난 후기는 뭐랄까 꼬여버린 인생들의 조절되지 않는 복수심과 분노가 집약된 스토리였달까. 주로 복수는 권선징악의 면모를 가져야 속이 시원한데 주인공 중 어떤 누구도 선하지 않았다. 악과 악의 전쟁. 그리고 꼬여버린 인생의 주인공들이 모두 동양인이라는 게 BEEF의 성공포인트인가 싶기도 하고. 서양인이었다면 총으로 해결했을 법한 분노를 결국 곪아터져 버린 복수로 되갚는다는 게 너무도 아시안스러운 전개였달까.


내가 답 없는 분노를 느껴본 순간들이 언제였을까 생각해 보면 주로 회사 생활에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기억도 나지 않는 원인과 별 것 아닌 마찰들.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종종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 들 때도 있고 충분히 설득하지도 설득당하지도 못해 마음 한편에 화가 가득한 채 하루를 마무리하는 날들도 있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던 날들은 그 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사람에게 향하기도 하고, 커피 한 잔 하며 여러 사람과 뒷담화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느꼈던 분노가 가장 극단으로 치닿게 되면, 인생이 꼬일 만큼 꼬여버린다면 그 결말이 BEEF가 되는 걸까? 글쎄. 그래도 부디 픽션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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