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후추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onSun May 16. 2021

팔자 좋은 개

후추일기 아홉 번째


집에 강아지를 데려왔다고 하자 몇몇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잘 됐다. 다행이네. 그 개는 팔자가 좋다."


잘 됐다는 말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다. 당연히 호의로 하는 말이다. 안정된 집을, 가족을 만났다니 그것 참 강아지에게 잘된 일이다, 그런 말이라는 걸 알지만. '팔자'라는 말을 들을 때면 가슴이 서늘해졌다. 팔자가 좋지 않은 강아지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세상에 팔자라는 것은 차마 생각도 못할 힘든 사연을 가진 강아지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 말을 내뱉은 사람도 이런 사실을 대강은 알 것이기 때문에(모르려나?). 그러면서도 강아지를 입양한 타인을 향해 '팔자' 운운하는 건조한 마음이 상상되기 때문에 그렇다.


후추의 '팔자'를 생각하노라면 필연적으로 세상 어딘가에 '나쁜 팔자'를 안고 살고 있는 많은 강아지들이 의식된다. 그 강아지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던 보호자에게 버려지거나 학대 당하거나 영문도 모르고 보호소에 살거나 안락사 대상이 되거나 실제로 안락사를 당한다. 강제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고, 뜬장에 갇혀 살고, 더러운 것을 먹으며 산다. 그러면서도 눈 앞에 보이는 인간을 환영하고, 좋아하고, 그들을 향해 애정을 갈구한다. 인간이 뭐길래. 인간은 뭐길래 강아지를 그렇게 길들여놓고 방치하는 것인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 의식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의식하는 동시에 외면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후추의 안전을, 건강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 이것이 기만에 가까운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시골에 사는 부모님 집에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마당에 묶여 사는 강아지 '대박이'가 있다. 24시간 짧은 쇠목줄에 묶여 있고, 자기 집 옆에 똥을 싸면서 사는 강아지다. 남편과 강아지 입양을 한참 고민하던 시절에, 대박이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다. 만약 우리가 입양한 강아지를 부모님 집에 데리고 간다면? 우리 강아지는 집 안에서, 대박이는 그대로 마당에 묶인 채 있어야 하나? 그 둘은 함께 놀 수 있나? 대박이는 우리 강아지와 무엇이 다르기에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할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게 있을까? 내가 갈 때만 대박이 산책을 시키고, 애정을 나누고, 목욕이라도 한 번 시키면 대박이는 좀 행복해질까? 만약 대박이를 우리집에 데려온다면? 부모님은 다른 개를 또 대박이로 키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소셜 미디어에 매일 같이 올라오는 입양이 시급한 강아지들의 얼굴들, 그 절절한 사연들을 앞에 두고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만 지금으로서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 강아지들의 사연에 '마음에 들어요'를 누르는 일, 소액이나마 보호소에 후원금을 보내는 일, 내가 유기견을 입양했다는 얘기를 최대한 크게 말하는 일 같은 것은 강아지들이 놓인 현실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보호소에서 자원봉사 하는 분들이나 동물권 활동을 하는 분들, 강아지를 임시 보호 하는 분들처럼 할 자신은 도무지 없어 죄책감이 든다. 더구나 내가 마주하게 될 것이 무섭기도 하다. 어떤 현실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어디까지 다가가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가끔은 이런 고민이 너무 무겁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말들이 있다.

하재영 작가님과 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사이에 두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작가님은 “나는 비거니스트도, 실천주의자도 아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늘려가려고 애쓰는 사람일 뿐이다.”라는 책 속의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끝도 없는 고민이지만, 행위에 대한 결과를 알 수조차 없는 어려운 문제지만, 그래도 “동물을 사랑하는 일이 사람을 증오하는 일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 활동가의 말을 기억하면서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고. 자주 잊지만 이 말을 틈틈이 찾아 읽으면, 내가 시간을 들여 고민하는 이 행위도 결국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늘리"는 일로 연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괜히 그런 기대가 생기고, 응원이 된다. 지금으로서는 그 말에 기대 궁리하는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인터뷰를 하던 2018년. BH 시절의 나는 어떤 질문에도 확답하지 않는 작가님의 조심스러움을 다소 의아하게 느꼈지만 AH의 나는 그 태도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작가님이 최선의 진심을 보여준 것임을 안다.

그래서 나도 여기에 나의 부족함과 두려움, 망설임을 고백해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100%의 대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