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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리 Apr 07. 2022

초록모자에 집착한 아침

7. 천마산 (2021.11.07 일)


옷 입기에 까탈스러운 날이 있다. 뭘 입어도 성에 차지 않고, 평소에 입지 않던 스타일까지 손대보고 이것저것 입어봐도 결국은 처음에 입었던 착장으로 돌아오는 마법 같은 날. 천마산 출발하기 전 딱 나의 모습이었다.


갑자기 평소에 쓰던 스포츠 볼캡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구석에 넣어놨던 한 번도 안 쓴 초록색 인디언 모자를 꺼냈다. 가방도 가벼운 내셔널지오그래픽 폴리백을 집고는 기존의 등산가방에서 와르르 물건들을 쏟았다. 이렇게 알 수 없는 변덕을 부리면서 아까운 시간을 까먹었다. 그리곤 헐레벌떡 천마산으로 출발했다.


등산을 하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챙있는 모자는 위를 올려다볼  옷깃에 닿아서 목의 움직임이  편치 않았다. 가방은 가벼운 물건에도 엉덩이까지     발짝 내딛을 때마다 등짝에서 덜렁거렸다. ', 그냥 입던  입을걸' 속으로 외치지만 아무렇지 않은  산행을 이어한다.


그날은 무슨 바람으로 패션에 욕심을 부렸나 모르겠다. 가끔 빨주노초파남보 다른 등산객이 부럽다. 산에서는 확실히 쨍한 원색을 입어줘야 생기가 돌고, 산도   오를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장비에 욕심을 부리다 보면 본질을 잊게 된다. 그리고 본질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부가적인 요인에서 환희를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절제력이 0에 가까운 나를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통제하곤 한다. '바람막이 겉옷이 있으니 지금은 더 필요가 없지.', '고어텍스 볼캡은 하나면 충분하지.', '등산화 색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끈을 바꿔서 신어보면 되지.' 본심을 철저히 외면하며 본질에 집중하려고 부단히 자신을 설득한다. 이 날처럼 심술이 나서 옷장을 헤집고 이상한 차림으로 산행을 하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아 지는 나이기에 오늘도 구매욕구를 참으며 무탈하게 넘어가 본다.





천마산

2021 11 7 일요일, 천마산에 다녀왔다. 천마산의 흔들리는 구름다리를 기대했지만 짧고 조금의 반동이 있는 다리였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요상한 차림으로 다녀온 산행. 풍경이  트였으면 좋았으련만 애석하게도 기분도, 경치도  좋진 않았다. 낙엽에 파묻혀 툴툴대며 다녀왔지만 정상의 국기봉은  멋졌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순간들이 멋졌던  기도 하다.



#문제의 그 초록 모자

낙엽길 위에서 내 기분을 달래며 한 걸음씩 걸어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지만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등산스틱을 휙 꽂은 가방이 애처롭게 달랑거린다. 지금 보니 세상 어이없는 차림이다. 등산스틱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지퍼가 지익-지익- 내려가서 어느 순간 호주머니 옆으로 내려와 있다. 가방은 두께가 있는 배낭을 메는 것이 옳은 것이거늘.


살면서 구름다리를 가 본 기억이 없다. 아마 한 번은 다녀왔을 건데, 기억에 없으니 카운트하지 않겠다. 내 상상 속 구름다리는 길고 웅장해서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심장이 덜컹하는 스릴 있는 철제물이다. 천마산의 구름다리는 한강대교와 닮아있다. 상당히 안전하고, '다리'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감성보다는 이성에 가까운 다리였다. 그래도 철제 케이블에 연결되어 있으니 '공중에 있는 다리구나'라는 실감이 난다.



#맑고, 흐리고

내내 흐림이다가 번쩍 해가 나타나고는 또다시 흐림이다. 해가 구름 뒤에 숨어 애간장을 태우기도 한다. 해가 없으면 묵묵하게 땅을 보며 오르다가, 해가 나오면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풍경을 감상한다. 해의 유무가 이렇게나 산행의 중요한 요소구나. 해도 없는데 대기에 먼지와 안개가 잔뜩 껴있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열심히 산행이다. 개인적인 통계상으로도 날이 좋은 날보다, 좋지 않은 날의 산행 기록이 월등히 좋다. 호들갑 떨며 사진 찍는 사진을 절약했기 때문이다.



#국기봉이 있는 정상

정상에는 열심히 펄럭이는 태극기가 있다. 늦게 출발한 터라 짧은 휴식 후 바로 하산한다. 800미터의 산은 처음이었는데, 오르고 내려가기 바빴다. 날이 좋았더라면, 조금 더 일찍 출발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있지만 돌이킬 수 없는 후회는 잊는 편이 낫다. 쉴 새 없이 휘날리는 국기봉을 바라보며 정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끌어올려본다.



#휘뚜루마뚜루 하산

하산하면서 해가 지더니,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여름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해의 시간은 벌써 겨울이다. 조급한 마음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도 걸음을 재촉한다. 야등은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핸드폰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고 하산하는 것을 목표로 빠르게 내려간다. 올라올 때도 으스스한 느낌을 풍기던 낙엽이 내려갈 때는 어둠의 레이어가 한 겹 더 겹쳐져서 스산한 향기를 낸다. 주차장에 도착한 후 완전한 어둠이 깔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산행을 마치며

그날의 산행일지

천마산은 800미터 첫 산이자, 가장 조급하게 오른 산이자, 가장 어둡게 내려온 산

천마산에서 느낀 점
1. 정상에서 꼭 신발끈을 조이고 내려오자 (발목보호)
2. 가을 골목의 시기에는 2시 전에 산행 시작하기
3. 더 높은 산을 위해 무릎보호대 구매하기
4. 집에서 출발 전 핸드폰 배터리 가득 채우기
5. 산행 전에 너무 기름진 음식 먹지 않기
6. 혼자 산행은 지양하기 (무섭고 위험)


초록모자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날도, 오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초록모자는 언제 마음에 들었던 걸까?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포스팅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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