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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욕심많은워킹맘 Apr 22. 2018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오늘도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다. 난 여전히 전진 중이니까


오늘 출근 후, 이면지 정리를 할 겸 서류 정리를 하다 우연히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발급하는 자격 득실 확인서를 발견했다. 2장의 서류로 그간 다닌 직장명을 살펴보니 그동안의 직장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나는 빠른 년생이라, 18살 고3 취업 이후 줄곧 직장 생활을 했었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자격증을 5개 이상 취득했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독학으로 회계 관련 자격증을 추가로 취득했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대학 입학하던 시기보다 3년 뒤 야간대에 진학해서 낮에는 직장인으로 저녁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두 가지 신분을 병행했었다. 내 월급으로 학비를 마련해야 했기에 장학금이 절실했다. 


뒤늦게 대학생이 된 내가 장학금에 욕심 내는 나의 모습을 보고 사무실 언니들이 다들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직장 다니면서 학교 다니는 것도 쉽지 않은데
왜 고생을 사서 하냐,
그냥 졸업증명서만 얻어간다고 생각해.
일찌감치 고달픈 욕심은 버리는 게 좋아.

네가 아직 대학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장학금이 그리 쉬운 게 아니야.
그냥 마음 비우는 게 나아.

대학 생활해본 선배라고 다들 나에게 부정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대학 생활 모르는 순진한 신입생에게 자신의 경험을 빗대어서 조언이라며 툭툭 내뱉었다. 하지만 첫 시험 후, 반에서 2등이라는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았고 졸업 때는 전과목 A+ 성적으로 졸업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의 내가 가장 치열하게 인생을 살고, 열정적으로 삶을 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방학에는 그 틈을 이용해 퇴근 후 1종 보통 운전면허 자격증을 취득했고, 또 다음 방학에는 국비로 회계 학원에 다니며 또 공부하는 삶을 실천했었다. 

뭐든 배우려고 했고, 뭐든 익히려고 했던 그때의 내가 참 보고 싶어 진다고 할까?

그 뒤로는 이력서를 내밀 때 굳이 필요하지 않은 성적증명서도 꼭 제출한다. '저 이만큼 열심히 살았습니다.'라는 또 다른 나를 표현하고 싶어서.


스물네 살에 남편과 만나 8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림과 동시에 대구를 떠나 부산으로 시집왔다. 이제는 미혼이 아니라 기혼이라는 신분으로 면접을 보러 다녔다. 주민등록상에 아버지 그늘을 떠나 그저 내 옆에 배우자가 생겼을 뿐인데 기혼이라는 이유로, 임신이나 출산에 대한 걱정으로 나를 채용하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은 기우였다. 신기할 만큼 면접 보는 곳곳마다 다들 입사 수락을 받았다. 무엇보다 면접 보는 업체 담당자가 하나같이 이런 말을 했다. 




"당신 이력서만 봐도
당신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한눈에 보입니다.
당장 출근하세요."




스물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도 한몫했겠지만, 열심히 살아온 나의 이력서를 다들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결혼 후 나의 첫 직장은 나는 내가 원하는 지역에, 원하는 연봉에, 원하는 업종으로 선택해서 입사했다. 

오늘 우연히 2장의 건강보험 득실 확인서를 살펴보다, 내가 다닌 직장 생활 경력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진다. 늘 버릇처럼 10년 넘는 직장 생활이라며 어렴풋이 근사치만 계산했지, 정확한 계산은 해본 적이 없었다. 누가 회계 전공자 아니랄까 봐 정확한 근속 일수 수치가 궁금해졌다. 

오늘 날짜 기준으로 엑셀 함수로 근속 일수를 계산해보았다. 그랬더니 오늘 일자 기준으로 4,922일을 근무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걸 개월 수로 환산해보니 13년 4.8개월, 13년 반이 나온다. 

올해 서른 중반, 첫 아이 낳고 잠시 휴직, 둘째 낳고 또 잠시 휴직, 그리고 지금 현재 직장을 다닌 지 곧 일 년이 다 되어간다. 10년 넘은 직장 생활이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다. 미혼 시절의 나는 배우고 싶으면 당장이라도 배울 수 있었고, 시작하려고 하면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내 안에 가진 내면의 결핍을 원천으로 뭐든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엔진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초등학생인 큰아들, 아직 엄마 손이 많이 필요로 하는 다섯 살 막내아들,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 어쩌면 미래의 나를 지키기 위한 권리보다 지금 내가 가진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의무가 더 많다. 하지만 괜찮다.



알잖아?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니까.




치열하고 충실하게 살았던 스물네 살의 내가 아들 둘에 한 남자의 아내인 지금 서른다섯 살의 나를 보았을 때 나는 제법 괜찮게 살고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영어 공부라는 배움을 놓지 않고 있고, 그때는 꿈꾸지 못했던 기록하는 삶을 실천하고 있으니 말이다. 



미혼 시절의 나는 오직 앞에 놓인 나만 보고 시속 100km 달려가던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같은 인생이었다면, 지금은 시속 10km로 시골길을 달리는 경운기가 된 것 같다.


큰 아이를 낳고 엄마라는 이름을 처음 입은 시절, 그때의 나는 서툰 육아로 씨름하느라, 나만 정체된 것 같고, 내 삶을 모조리 잃어버렸다는 생각뿐이었다. 지나온 내 인생에 대한 허탈감과 자존감은 밑바닥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정체기라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도 흘러가고 있었다. 비록 느리지만 나의 소중한 울타리인 가족들의 웃음, 행복, 따뜻함을 느끼며 천천히 달려가고 있었다. 시골길에 핀 꽃도 보고 나무도 보고 경치도 보면서 그렇게 여유 있게 가고 있을 뿐이다. 조금 느릴 뿐, 아이가 커갈수록 내가 움직이는 속도도 함께 높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지금, 육아로 성장한다고 해야 할까?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걸어가는 길은 똑같다. 다만 조금 늦을 뿐이다. 미래의 나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나는 지금 내가 지키고 싶은 현재도 많으니까.



그래서

오늘도 천천히 가도 괜찮다.

어쨌든 나는 지금도 전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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