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일 : 불발
프로그램 론칭에 실패한 후 이런 생각이 들었다
3개월가량 론칭을 위해 노력하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구성 회의와 섭외까지 이어지던 상황이었고, 최근에는 구성을 더 다지기 위해 포맷 수정 회의를 한 후 구성안을 다시 쓰는 작업까지 했다. 거진 3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함께 고생한 후배와 나는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오직 프로그램 론칭이 되기만을 바랐다.
지난 금요일 저녁 담당 피디에게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섭외 상황이 좋지 않아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다는 마무리 통보 전화였다. 물론 처음부터 채널에서 원하던 소위 A급 스타들이 섭외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다음 급이라고 할 수 있는 배우들과 가수의 섭외가 완성되었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향성에 대해서도 따로 구성 회의를 했던지라 어떤 방식으로든 론칭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프로그램 론칭을 위해 함께 달려온 건 담당 피디도 마찬가지였기에 그 역시 낙담한 눈치였다.
피디는 연신 미안하다, 속상하다는 말을 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아직 완전한 불씨가 꺼진 건 아니었기에 하반기에라도 좋은 소식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과 다른 아이템으로 다시 시도를 해보자는 희망에 찬 메시지를 던지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동안 고생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밥이라도 먹자는 말과 함께 그 통화는 종료되었다.
그리고 함께 고생한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달하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인사를 건넸다. 후배는 애써 웃으며 백방으로 노력했는데도 섭외가 안 된 걸 어떡하겠어요,라는 말로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피디와 통화할 때만 해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후배와 통화를 하면서 속상함과 자괴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능력이 부족했던 걸까?'
'다른 언니들이라면 어떻게든 섭외를 성공시켰을까?'
'아니면 구성을 달리하고 섭외를 더 해서 어떻게든 론칭을 시키자고 더 들이댔어야 하는 건가?'
통화를 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지만 나도 모르게 후배에게 자괴감이 든다는 말을 꺼냈다. 후배는 왜 언니가 자괴감을 느끼냐며 한사코 나를 말렸지만, 이게 윗사람들이 겪는 감정인가 싶을 정도로 죄책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능력 있고 아끼는 후배에게 돈 한 푼 못 주고 고생만 시킨 못난 언니라서 미안하고, 조금만 더 능력이 있는 언니였다면 3개월의 결과물이 론칭 실패는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미안했다.
그리고 오늘 친한 선배 언니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윗사람의 고충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데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차라리 위에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게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한 거였다. 언니는 메인으로 꽤 오랜 시간 일을 하면서 마음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고 했다. 피디 눈치 보랴, 후배 작가들 눈치 보랴, 채널이 원하는 것도 들어줘야 하고, 광고주가 원하는 사항까지 들어주다 보면 머리가 아파서 두통약을 달고 살았고 불면증은 덤으로 얻었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재빨리 다른 피디와 미팅 날짜를 잡았다. 동시에 진행을 하던 프로젝트가 몇 개 있어서 아직은 희망을 놓지 않고 있지만, 만약 이번 프로그램도 론칭이 어렵게 된다면 내게 주어진 길이 이 길이 아님을 받아들이고 다른 프로그램을 알아봐야 한다. 프리랜서 작가의 숙명이겠지만 하루빨리 레귤러 프로그램을 시작하지 않으면 나의 통장은 금세 텅장이 되어버릴 것이다. 아르바이트 격으로 하는 외부 일만으로 생활비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하다.
속상한 건 속상한 거고,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뛰어야 한다. 확실한 건 이번 경험으로 나는 꽤 많은 걸 얻었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한뼘의 성장은 이루었다고 확신한다. 정신 승리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위안을 얻고 다시 뛰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