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일 : 당연한 일
일 관련 통화를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전에 일 관련 통화를 하게 됐다. 함께 일하고 있는 피디였다. 열흘 전에 올린 구성안과 지난주 금요일 내가 단체방에 공지한 내용에 대한 피드백이었다.
지난주 금요일, 촬영에 필요한 내용을 찾아달라고 먼저 부탁을 한쪽은 나였다. 그런데 오늘 오전, 피디가 그 내용을 정리해달라고 단체방에 올렸다. 피디가 편집본을 확인해야 하는 부분이어서 부탁을 한 거였는데 작가에게 해달라는 말에 이해가 안 돼서 전화를 걸었다.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피디의 입장과 나의 입장은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 내용을 찾을 필요가 없는 구성으로 바꿔보겠다고 했다. 내 말이 끝난 후 날아온 피디의 한마디는 나를 진심으로 열받게 만들었다.
"당연히 작가님이 해주실 일이죠. 저는 이제까지 그렇게 일해왔어요."
당연히? 나는 피디에게 말했다.
"피디님, 여기서 당연하다는 말을 쓰시면 안 되죠. 피디님에게는 그게 당연할지 몰라도 저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에요."
자신이 경험한 세상이 남에게도 반드시 그렇게 적용되리라고 판단하고 말하는 사람. 그는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그렇게 일을 해왔으니 당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까? 나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냐고 묻는 게 먼저 아닐까?
피디는 내가 이해가 안 된다면서,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들렸다면 내 말투나, 화법에 문제가 있는 거니 그건 너무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내 말투가 고쳐질 거 같지 않으니 앞으로 사사로운 일은 밑에 후배와 통화하시도록 하겠다고, 다시는 우리가 통화할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고 끊었다.
전화를 끊고 더 화가 났다.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지금 그 피디와 통화해서 상황을 정리하라고 전달한 후, 내가 열이 받은 이유를 곱씹어 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피디가 작가에게 통보하는 걸 싫어한다. 피디와 작가는 동료 관계이지 상하 관계가 아니다. 가끔 작가를 아랫사람으로 보고 하대하는 피디들이 있지만 그런 경우 상종을 하지 않는다. 논의가 아닌 통보라는 건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판단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와 통화를 한 피디는 갑질을 하는 피디는 아니다. 그의 잘못은 자신의 '당연한'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 오전 단체방에 특정 업무를 작가에게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말투가 명령조는 아니었지만 내가 먼저 장문의 내용으로 정리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6일이 지나서야 작가들에게 정리를 하라고 툭 올려놓았다는 것. 심지어 좋게 좋게 설득을 해보려는 사람에게 그건 '당연히' 작가의 일이라고 말하다니,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입장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이 피디가 나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지금 그럴 여력이 없으니 수고스럽겠지만 도와줄 수 있냐는 한마디만 했더라면 나는 밤을 새워서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한' 일을 왜 걸고넘어지냐는 그 태도에 나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당신에게 '당연한' 일이 타인에게도 '당연한' 일로 여겨질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에겐 1도 당연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