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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가 J Oct 17. 2022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서

연애 프로그램이 끝도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환승연애, 체인지데이즈, 나는 솔로, 돌싱글즈 등등. 연애 프로그램을 두고 남의 연애를 왜 지켜보고 있냐고 혀를 끌끌 차는 사람과 마치 내가 그 현장에 난입한 것처럼 과몰입하는 두 가지 유형의 시청자가 존재한다. 나는 정확하게 후자다. 매주 방송을 기다리며 누군가를 응원하기도 했다가, 또 누군가를 욕하기도 한다. 연애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처럼 '남의 연애'에 왜 감정을 섞고, 그들의 기류를 팔로우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주 심플하게 답할 수 있다. 그들이 겪는 감정을 나도 겪었으니까. 그때의 내가 생각나고, 또 그때의 내가 안쓰러워서.


연애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니 엄격했던 X가 생각난다. 그는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 나를 가장 많이 혼냈고, 나는 일방적으로 잔소리를 듣는 입장이었다. 그런 그와 연애 프로그램을 보다가 크게 싸운 적이 있다. 싸움의 발단은 나의 과몰입으로부터 시작됐다. 나는 방송으로 보이는 내용을 보고 남자의 행동을 지적하고, '비난'했다. 하지만 X는 남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두 사람만 아는 거라고 나의 비난은 '잘못'이라고 야단쳤다. 보통의 나라면 일부 수긍하고 넘어갔을 텐데 그날따라 호르몬이 열일을 하고 있었는지 참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고 결국 말싸움으로 번졌다. 나는 남자의 행동이 왜 잘못인지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했는데, 내 논리에 억측이 섞여있다며 그도 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도 할 말을 끝까지 이어갔고, 우리는 이 싸움으로 인해 오랜 시간 연락하지 않았다. 몇 주의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다시 만났지만 그날의 싸움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기로 무언의 약속을 했다. 그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절대 포기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 연애할 때 무쓸모, 무의미라고 불리는 '자존심'이었다. 


다시 돌아가서 요즘 내가 즐겨보는 연애 프로그램은 '환승연애2'. 지난 시즌은 거의 초반부터 정주행을 했던 사람이지만, 시즌2의 경우 출연자들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해 5회가 방영될 때쯤 정주행 대열에 합류했다. 2시간을 훌쩍 넘기는 러닝타임 때문에 매주 영화 한 편을 보는 기분으로 시청했지만, 솔직히 재미 유무를 떠나 예능 프로그램을 2시간 넘게 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에 약간 빠른 속도를 유지하며 플레이할 수밖에 없었다.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가 거듭될수록 과몰입을 시작했고 몇 회 남지 않은 상황에서 SNS를 켜기만 하면 등장하는 그들의 서사와 짧은 영상을 보고 또 보기 시작했다.


그중 '연애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는 X커플. 아마 이렇게만 설명해도 '환승연애2'를 본 사람들이라면 바로 누군지 알 수 있으리라. 4년을 사귄 희두와 나연은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남아있는 X커플이다. 그들이 핫한 건 화려한 외모와 스펙도 한몫했겠지만 무엇보다 자존심을 건 말싸움을 시도 때도 없이 하기 때문이다.


"그니까 난 너가 자존심 부리는 걸로 밖에 생각이 안 들어."


"너는 왜 모든 일에 자존심이 들어가?"


여자는 X에 대한 감정이 너무 크지만, 프로그램의 취지에 맞게 새로운 사람과의 데이트를 통해 또 다른 그를 알아가려 한다. 하지만 X에게는 '재회'를 원하고 우리가 다시 잘 만나려면 서로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가 X에게 바라는 건, 자신을 무시하거나 막 대하지 말라는 것.


반대로 남자는 새로운 사람과 데이트도 하고 호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X의 솔직한 마음을 듣고 난 뒤 X의 행동을 관찰하고 잘못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X가 마음이 있다면서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거나 행복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조금 놀란 건 X의 마음을 확인한 후, 남자는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마음을 전달하지 않았다. 직진하려던 상대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시도할 때마다 싸운다. 싸움의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두 사람은 대화의 출발이 다르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이 좋다면서 다른 남자랑 데이트를 하는 행동이 영 거슬리는 것이고,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보다 아껴주길 바라고 재회하길 바란다.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하면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풀어간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이 대화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 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존심'이다.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자존심. 프로그램의 패널들 역시 두 사람은 자존심이 너무 세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여전히 사랑하고 있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보다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강렬해서 끊어지지 않은 끈을 계속 매만지기만 할 뿐 절대 당기지 않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면서 우리는 모두 혀를 끌끌 찬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쉽게 흘리지만, 아마 우리도 연인과 싸우는 모습을 촬영해서 본다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연애를 보며 대판 싸웠던 나와 X처럼 누구나 한 번쯤은 진절머리 나게 연인과 싸워봤을 것이다. 우리가 끝이 보이지 않는 평행선과 같은 말싸움을 하는 것은 나연과 희두처럼 자존심을 굽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연애를 할 때 한쪽이 일방적으로 져주고, 받아주고, 배려해 주는 경우도 많이 봤다. 그럴 때마다 약자로 보이는 쪽이 안쓰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저 사람은 자존심도 없나?'라는 생각과 함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자존감이 높은 게 아닐까?


상대를 할퀴듯 자존심을 끝끝내 굽히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감정을 보호하기 위해 최후의 방어막으로 자존심을 내세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나 역시 누군가에게 방어기제로 자존심의 날을 세우던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강자 앞에서 더더욱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편이고, 나를 공격하거나 잘못을 지적받을 때는 더 센 척을 하려 했다. 하지만 3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때, 자존심이라는 건 굳이 입 밖으로 또는 행동으로 거칠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무던하게 '지켜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지켜낸 자존심이 곧 자존감을 높이는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보통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쉽게 말하고, 센 척을 한다. 편한 상대를 통해 자존감을 높이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의미 없고, 무지한 행동인지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알게 된다. 오히려 상대의 자존심을 지켜줬을 때 내 자존감이 올라간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오늘 가족, 친구, 동료, 연인과 말다툼을 했다면, 끝끝내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헤어졌다면,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건네보길 바란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처음은 어렵겠지만 두 번, 세 번 이런 순간들이 반복되면 당신의 자존감은 단단해질 것이다. 또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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