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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가 J Apr 21. 2020

이번 생이 모두에게 기적같기를

2019년에 본 드라마 중 <동백꽃 필 무렵>은 단연 최고였다. 재미와 감동, 스릴까지 모든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한 장면도 쉽게 넘기지 못했다. 공효진의 연기가 참 매끄러웠고, 강하늘의 바보 같지만 순애보 같은 사랑이 참 부러웠고, 어리지만 어른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필구의 연기에 감탄을 자아냈다. 이 드라마를 정주행 하면서 많이 울고, 웃고, 무서워했지만 마지막 회차에 달린 제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기적 같은 소리'


동백이의 삶은 너무나도 기구했다. 가난 때문에 엄마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자랐으며, 사랑하는 남자 친구와의 관계도 떳떳하게 밝힐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가진 아이마저도 홀로 낳아서 키워야 했고, 정착하며 살기 위해 도착한 옹산이라는 도시에서도 그녀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월세를 내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악착같이 일을 했지만 술집 여자로 오해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뒤늦게 나타난 용식이라는 남자로부터 진심 어린 사랑을 받는 줄 알았지만, 어릴 적 자신을 버린 엄마가 나타나 죽을 위기에 놓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동백이 기적 같은 건 자기 삶에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사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던 건 마지막 회차의 제목 때문이었다. 동백이의 삶에, 그리고 내 삶에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랐다. 아니 드라마니까,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서 동백이도, 동백이 엄마도, 필구도, 용식이도 모두가 행복해지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동백이에게 현실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작은 희망마저 모두 사라져 버리는 기분이 들 테니까. TV를 보면서 나도 이렇게 빌고 있는데 동백이 마음은 어떻겠냐고 생각할 때쯤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


"기적이 어딨어요. 제 그지 같은 인생에 그딴 거 없어요."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희망을 갖고, 기적을 바랄 때가 있다. 나는 주로 스포츠를 볼 때 기적을 바란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너무 큰 점수 차로 지고 있을 때 나는 기도를 한다. 이번 경기만 기적적으로 이기게 해 달라고. 물론 내가 기도를 한다고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그건 알고 있다. 그래도 기도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일찍 포기하기도 한다. 가망성이 보이지 않을 때, 또는 최근 경기에서 꾸준히 기량이 떨어져서 보는 나까지 우울해질 때. 그런 경기를 볼 때는 아예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차라리 오늘 대판 지고 정신 차려라! 하고 속으로 욕을 하기도 한다.


또 내가 기적을 꿈꿀 때는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가졌을 때다. 내가 마음을 주고 싶은 상대가 생길 때면 어김없이 기도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좋아하게 해 주세요!'


연애를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져 봤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똑같이 나를 좋아하는 것만큼 기적 같은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느낄 것이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을 나는 줄곧 바라왔고, 지금도 바라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동백꽃 필 무렵> 마지막 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참고 참았던 슬픔을 토해내던 동백이와 그걸 바라보며 함께 울던 용식이에게 서서히 다가오던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용식 : 저기... 그냥 옆에만 좀 있어도 돼요? 내가 보고만 있기가 힘이 드네. 저 그냥 옆에 앉아만 있으면 좀 안돼요?
(가만히 지켜보다가 동백이가 두 팔을 벌리자, 용식이가 동백이의 품에 안겨 함께 운다.)
동백 : 나 이제 장사 안 할래요. 다 때려치울 거야. 착한 척, 굳센 척 이제 안 할 거예요. 나 진짜 진짜 열심히 살아봤는데 나한테만 이렇게 야박해. 고아원에서 진짜 열심히 최고 말 잘 들어봤자 항상 다 선물 받는 연필만 주고. 금수저 흙수저 막 싸워대는데, 난 그나마 있지도 않았다고. 마리오도 동전을 모으면 뭘 받는데, 왜 나는 개뿔을 안 줘요. 그놈의 아자아자 파이팅 진짜 지긋지긋해. 그래 봤자 다음에는 피박인데 뭐. 내 거는 다 뺏어가면서 기적? 기적 같은 소리 하네. 나 이제 그딴 거 구걸할 생각도 없어요. 안 할 거야.


동백이가 이 대사를 읊으며 오열에 가깝게 울부짖던 순간, 서서히 기적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나는 동백이가 참 부러웠다. 만약 동백이와 엄마에게 기적이 찾아오지 않아 감당하기 버거운 슬픔을 맞이하게 된다 해도, 이제 동백이 곁에는 그녀 한 사람만을 지켜주는 사람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을 테니. 결국 동백이 인생에서 기적은 사람이었다.


먼 훗날 동백이가 용식이에게 말한다.


"이번 생이 정말 다 기적 같다."




만약 누군가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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