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를 하다 보면 환자가 자신을 잘 치료해 달라는 의미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울 강남에서 살다가 왔다거나, 대기업에서 꽤 잘나가던 사람이라거나, 돈이 많다는 이야기 또는 유명한 의사와 친척이라거나, 어느 유명한 병원을 다닌 적이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프게 되면 나의 아픔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으니 이런 과거 이야기는 들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통증 앞에서는 믿지 않던 신도 믿게 된다고 하니 돈, 재력, 지위, 지인을 자랑해서라도 한의사에게 내 통증을 이해하고 들어 달라고 하는 것이 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환자를 달리 보거나 더 잘해 주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래 다닌 단골들은 압니다. ‘법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을 많이 쓰지요. 의사 앞에서도 환자는 평등합니다. 그래도 자신을 잘 보아 달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픈 증상을 설명하는 것만큼 잘 들어 드려야 합니다. 그런 이야기 속에도 그 환자의 병의 원인이 숨어 있기도 하니까요. (엄청난 부자셨다가 부도가 나서 힘든 생활을 하게 되신 분들은 화병이 많습니다.) 그런데 10년 넘게 한의원을 하면서 좀 색다른 환자 동행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50대 사장님이 한의원을 왔습니다. 그분이 오기 전 60대인 동행자분은 한의원으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저희 사장님이 그 한의원에 가려고 합니다. 예약 가능할까요?”
“예, 가능합니다. 성함만 알려 주세요.”
이때까지는 흔히 있는 일이라 예약을 잡아 드렸습니다. 3시. 예약 시간 5분 전 동행자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주차장인데 사장님 올라가십니다. 간호사분들 대기해 주세요.”
“예?” 간호사가 응답을 하고는 제게 옵니다.
“원장님 아시는 환자분이세요? 아시는 분들도 이렇게는 안 하는데.”
동행자분이 문을 열고 사장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신발을 벗어야 들어오는 한의원이라 신발을 벗으시려 하시니 동행자분이 실내화를 사장님 발 앞에 내려 둡니다. 그 정도 의전은 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담 후 침 치료를 위해 사장님은 진료실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 동행자분이 제게 상담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원장님! 저희 사장님 엄청나신 분입니다. 잘 치료해 주셔야 됩니다. 원래는 주치의도 있으시고 정기적으로 다니시는 병원도 있으신데 제가 원장님 믿고 이리로 모시고 왔습니다. 그러니 정성껏 해 주세요. 진료비는 걱정 마시고요. 필요한 거는 다 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진료비는 낼 거니까 사장님께는 돈 이야기는 하지 마시고요.”
“그런데 환자분! 상담하시고자 한 내용이 사장님 증상에 관련해서라면 법적 보호자가 아니시라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고, 수행하시는 분이니 제가 드릴 말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다른 환자도 좀 보아야 해서요.”
“원장님, 저희 사장님이 소문만 내면 한의원에 환자가 엄청 올 거예요. 그러니 잘해 주세요. 저희 직원들 인원만 해도 이 병원 먹고살 수 있습니다.”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할 말을 할 여유 시간을 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른 환자 진료에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니까요.
“진료 시간이 1시간 정도 걸리니, 어디 볼일 보고 오셔도 됩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시기 지루하실 겁니다.”
“아닙니다.” 그러고는 환자들이 치료받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환자만 들어가실 수 있으니 대기실에서 기다려 주십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원장실을 나가자마자 치료실 방향으로 큰 소리를 내시면서 “사장님! 편안히 진료받으십시오”라고 하십니다. 그러고는 20분쯤 지났을 때 간호사에게 ‘우리 사장님’ 무슨 치료를 받고 있느냐, 치료실 들어가서 잘 받고 계신지 보고 나와 달라고 하십니다. 환자는 사장님이었고 그의 동행자는 비서도 아닌 그 회사 부장님이었습니다. 진료가 끝난 후 치료실에서 나오는 사장님을 보고 부장님이 말씀하십니다.
“사장님, 수고하셨습니다. 힘드셨지요. 여기 원장님께 잘 치료해 달라고 제가 부탁을 여러 번 했습니다”라고 하시면서 구두를 사장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그렇게 두 분이 한의원을 나간 후, 한 환자분이 저한테 “사장이야? 깡패 두목이야? 치료 잘 받으십시오 인사를 뭐 그리 큰 소리로 한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간호사들과 환자들에 대해 치료에 필요한 이야기 외에는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부장님 일은 한동안 점심 먹을 때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 사장님도 부장님도 그 회사 직원들도 한의원에 회사 이름을 밝히고 한 명도 오지 않아서 황당하지만 재미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사장이라는 지위로 부하 직원을 폭행하고 퇴사한 직원까지 괴롭혀 사회문제가 된 내용을 보면서 그 부장님이 떠올랐습니다. 나이가 더 많지만 사장에게 의전을 했던 것이 기꺼이 한 행동은 아니리라. 해야만 한다고 느껴서 억지로 했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때는 사장님이 이상한 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도 내가 한의원을 꾸리는 원장이어서 사장의 이상한 점을 안 보려고 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아파서 오는 병원이니 사회에서의 자리는 내려 두고 오셔도 됩니다. 병원은 많이 아플수록 보호자가 필요한 곳이지 의전해 줄 사람이 필요한 곳은 아닙니다, 라고 뒤늦게 사장님께 한말씀 올립니다.
<작은책>에 실렸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