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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Sep 22. 2024

마지막 편지

, 그리고 트리플샷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침에 집을 나서며 또렷한 가을의 경계를 느꼈습니다. 어제는 종일 비가 왔고, 함께 분 바람이 조금 시원해진 공기를 실어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작년 이맘때부터 써 온 편지 형식의 일기가 딱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처음엔 한 사람을 바라는 편지였습니다. 그렇게 서너개월을 꾸준히 적다가, 중간에 감사한 기회로 그이와 재회하며 편지를 더는 적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소회를 남기기를 서너 달, 그렇게 그리움과 환희와 슬픔과 절망이 골고루 담긴 희로애락의 편지는 사계절을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늘은 편지의 의미가 일기로 변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어제가 '마지막 편지'였던 셈입니다. 사연으로 시작해 삶의 심연에 자리잡게 된 이 편지가 온전한 1년이 되었음을 자축하며 맞이한 주일이었는데, 미사 시간에 주임 신부님은 기념할만한 편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건 이후로 앞으로 일상에 지나친 의미 부여는 하지 않기로 했지만, 정말 묘하지 않나요?


오늘 미사는 9월 20일이 축일인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는 영성 축일 미사였습니다. 미사 중에 주임 신부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옥중 편지 일부를 소개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박해로 인한 투옥생활 중에도 총 20통의 편지를 자신의 스승이신 르그레즈 신부를 비롯해 가톨릭 교구의 주요 신부님들을 수신인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1번째 편지는, <마지막 회유(適論)>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남아 박해를 받을 교우들에게 보내십니다.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계신 듯  유서와 같이 쓴 편지는 엄숙하면서도 담대하고, 장렬하면서도 간절합니다. 그리고 함께한 동지들에게 전할, 그리고 그들이 실천으로 베풀고 또 이끌어야 할 '사랑'을 말하십니다.


...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자비하신 때를 기다려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 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하노라.

- 김대건 신부 ‘마지막 회유(適論)’ 中


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회유는 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이 땅에 말씀과 진리의 울림이자, 밑거름이자, 씨앗임을 알게 했습니다. 편지에 한 약속은 두려워하지 않은 짊어짐으로 지켜지게 된 셈입니다. 오늘의 강론에 소개된 복음 중 일부입니다.


...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지혜서 3.2-4)


선구자들의 희생에 의해 이 땅에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고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대 축일 미사 내용의 일부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에서 일부러 먼 길을 골라 석촌 고분로를 따라 한동안 걸었습니다. 하늘이 무척 맑았습니다. 유독 더웠던 올여름, 여느 날 같으면 천천히 걸어도 땀이 몹시 났을 텐데 오늘은 한참을 걸어도 괜찮았습니다. 걸으며 오늘 미사에서 여러모로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 ‘편지'에 대해 생각을 조금 해 보았습니다. 편지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저는 편지를 말하자면 할 이야기가 적지 않습니다.


집 현관을 들어서면, 처음 보이는 탁자 위에 지난 생일에 일곱 살 조카로부터 받은 편지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어머니가 불러주는 대로 적었겠지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축하의 말이 적혀 있어 그 순진하고 순수함에 절로 웃음이 지어지고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그 편지를 보면 어릴 때 아버지께 쓴 첫 기억 속 편지가 떠오릅니다. 아버지 생신 때, 색종이 위에 색연필로 생신 축하 메시지를 적어 잘 접어 드렸습니다. 무슨 말이었고 어떤 의미였는지도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은 편지였다는 것을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혼나고, 극심한 반감과 미움에 마음에도 없는 사죄를 하고 씩씩거리며 방으로 돌아가도, 시간이 지나 마음의 악함이 사그라들고 나면 혼내면서도 속상한 듯 흔들리던 당신의 눈빛만이 슬프게 남았습니다. 그게 너무도 마음 아프고 죄송스러웠지만 직접 말할 용기가 없어 대신 훌쩍이며 반성의 편지를 적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는 채 하지 못한 말을 이리저리 다듬고 이어 붙여 한 통의 편지를 적고는, 다음 날 등교하기 전에 슬쩍 안방 테이블 위에 올려 뒀었습니다. 아버지는 편지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우셨는지 웃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심 어린 마음이 잘 전해졌다는 것은 다시 따스히 대하시던 모습에서 분명 느낄 수 있었습니다. 편지에게 고마웠던 첫 기억입니다.


군인이었을 때,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는 요즘 군대 분위기에서는 어색한 광경이었겠지만 바깥세상으로부터 도착하는 편지는 위로이자 위안이었고, 아직 멀쩡히 이 사회에 나를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는 오롯한 존재의 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편지가 기다려졌었습니다. 다행하고 과분하게도 많은 편지를 받게 되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는 할아버지로부터의 편지였습니다. 대학교 동기들이나 어렸던 여동생이 쓴 예쁘고 알록달록한 편지와 다르게, 문구점에서 파는 하얀 바탕에 정직하게 그어진 까만 줄이 전부인 편지지에 요즘으로 치면 캘리그래피 만년필 서체와 같이 멋들어진 글씨체로 넉 장 가득 쓰인 편지는, 그 내용이 너무도 눈물겨워 읽고 또 읽었었습니다. 할아버지 생전에 그렇게 손자와의 만남을 바라시며 그리운 마음을 편지에 꾹꾹 담아 응원의 말씀과 함께 전하셨는데, 정작 제대하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 했습니다. 편지를 생각하니 문득 할아버지가 너무도 보고 싶어 집니다.


종이로 더는 편지를 쓰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저는 아직도 종종 종이 위에 펜으로 편지를 씁니다. 종이에 쓴 편지는 사실 그 걸 상대방이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을 좀 더 진하고 밀도 있게 담을 수 있습니다. 다 적고 나서 봉투에 넣어 봉하고, 그걸 전하며 하는 기대와 설렘은 이메일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터넷 공간에 거의 매일 편지를 써 저장하는 것으로 타협해야 했던 편지함이자 일기장이 있습니다. 그걸 시작한 지 오늘이 딱 1년째입니다. 거의 매일 적어온 상상 속 그리운 이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계절, 일상, 바람(hope), 회고,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매일 편지를 쓰는 건 마치 기도와도 같다고 느낍니다. 기도이자 회고이고, 묵상이기도 합니다. 좀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그만두면 살짝이라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게 마땅한 그런 일.



'인간은 자신의 일기에도 거짓을 적는다'


오랜 크리스천인 친구가 새 가톨릭 신자인 제게 해 준 말입니다. 언뜻 이해되지 않았으나 곧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이 아닌 일기라서 그런지, 또는 내가 되고 싶은 나 스스로의 이상향을 꿈꾸느라 그런지 간혹 있었던 일의 의미를 과장하거나 왜곡해 적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편지는 대체로 연인이나 가족, 멀리 있지만 마음이 가까운 친구와 같이 인연이 깊은 사람에게 씁니다. 그립거나 애틋한 사람에게 그립거나 애틋한 마음을 담아 하고자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보다 더 솔직해질 수 있을까요? 조금 과장될 수는 있어도, 수식어구로 진실을 감추기가 오히려 어려울 것입니다. 편지는 차분하게 생각하고 적을 여지가 있으니 조금 신중한 언어 선택도 가능합니다. 일기를 쓰다가 틀렸다고 장을 찢어 버리지는 않겠지만, 편지는 적다가 틀리면 그 장을 모두 버리고 새로 쓰는 한이 있더라도 더 정성을 들이게 됩니다.


소녀 안네 프랑크가 나치가 점령한 무서운 바깥세상으로부터 도피해 비밀의 장소에서 일기장 친구 ‘키티’와 대화하듯 써 내려간 <안네의 일기>는 현대인들의 필독서로 역사 되새김의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안네의 일기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안네가 편지를 쓰는 대상은 무한의 상상 속에 존재합니다. 왜 편지였을까요? 어쩌면 안네 프랑크는 자신의 비좁고 억압된 현실에 스스로에게 쓰는 형식의 일기 보다 비록 상상의 세계에 살지만 나보다 더 자유로울 키티에게 편지를 씀으로써 더 큰 해방감 속에서 풍부한 사색을 곁들인 솔직한 사실을 남기려 했을지 모릅니다. 원래 독백보다 잘 들어주는 친구에게 말할 때 이야기 꽃은 더 풍성하게 피게 마련이니까요.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것은 사람들의 진심은 정말 착하다는 것이다. (ondanks alles, omdat ik nog steeds aan de innerlijke goedheid van den mens geloof)

– 안네의 일기 中


진심을 담은 편지는 진정성의 힘을 갖습니다. 편지를 읽는 이는 분명 그 진의를 알고 또 자신의 마음을 더해 해석하고 이해할것이므로, 또 다른 교감의 세계가 그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글을 쓰며 마신 커피는 '샷을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였습니다. 가을 공기가 좋아 오래 걸었더니 조금 덥고 목이 말라 시원한 것이 마시고 싶었고, 편지를 떠올리니 좋은 기억부터 후회의 씁쓸함까지 만감이 교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사 시간에 서로 한 '평화의 인사' 이후에도 마음은 썩 평화로워지지 않아 쓰디쓴 시원한 커피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편지로부터 한 성인의 외침과 그 반향을 알고, 나의 일상 속 편지로부터 그것을 계속할 의미와 의지 있음에 행복하고, 그럼에도 편지 속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한 많은 일들이 못내 아쉬운, 맑은 가을 하늘의 주일입니다.


너무 맑았던 가을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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