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드바이블 '믿음의 시작' #1
아침에 집을 나서며 또렷한 가을의 경계를 느꼈습니다. 전날에는 종일 비가 왔고, 함께 분 바람이 한층 시원해진 공기를 실어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작년 이맘때부터 써 온 편지 형식의 일기가 딱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처음엔 한 사람을 바라는 편지였습니다. 그렇게 서너 달을 꾸준히 적다가, 감사하게도 다시 그이와 재회하며 편지를 더는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소회를 남기기를 서너 달, 그렇게 그리움과 환희와 슬픔과 절망이 골고루 담긴 희로애락의 편지는 사계절을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늘은 편지의 의미가 일기로 변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어제가 ‘마지막 편지’였던 셈입니다.
사연으로 시작해 삶의 심연에 자리 잡게 된 이 편지가 온전한 1년을 맞이한 날, 미사 시간에 주임 신부님께서 기념할 만한 편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건 이후로는 일상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지 않기로 했지만, 정말 묘하지 않나요?
오늘 미사는 9월 20일 축일을 맞아,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는 영성 축일 미사였습니다. 미사 중 주임 신부님께서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께서 옥중에서 남기신 편지의 일부를 소개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박해로 인해 투옥된 동안 총 스무 통의 편지를 자신의 스승이신 르그레즈 신부님을 비롯해 가톨릭 교구의 주요 신부님들께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된 스물한 번째 편지는, **<마지막 회유(適論)>**이라는 제목으로 신자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계신 듯, 유서와도 같이 쓰인 이 편지는 엄숙하면서도 담대하고, 장렬하면서도 간절했습니다. 그리고 함께한 동지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실천으로 베풀고 또 이끌어야 할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자비하신 때를 기다려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 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서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하노라.'
— 김대건 신부 <마지막 회유(適論)> 중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회유는, 그분의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이 땅에 말씀과 진리의 울림이자 밑거름이자 씨앗이 되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편지를 통해 하신 약속은, 스스로 짊어지심으로써 지켜진 셈입니다.
오늘 강론에서 소개된 복음 중 일부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 지혜서 3,2-4
미사를 마치고, 성당에서 나와 일부러 먼 길을 골라 석촌고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늘은 무척 맑았습니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여느 날 같았으면 천천히 걸어도 땀이 났을 텐데, 오늘은 한참을 걸어도 괜찮았습니다. 걸으며 오늘 미사에서 유독 의미 있게 다가온 ‘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편지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편지를 말하자면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집 현관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탁자 위에는 일곱 살 조카가 생일에 보내준 편지가 있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불러주는 대로 적었겠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쓰인 축하의 말을 보면 순수한 마음이 전해져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 편지를 볼 때면 어린 시절, 아버지께 처음 쓴 편지가 떠오릅니다. 생신날, 색종이에 색연필로 축하 메시지를 적어 정성껏 접어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무슨 말을 적었는지는 희미하지만요.
어느 날은 아버지께 꾸중을 듣고 반감과 서운함에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한 뒤 씩씩거리며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순간 속상해하시던 아버지의 흔들리는 눈빛만이 남았습니다. 그 모습이 마음 아프고 죄송스러웠지만, 막상 직접 말할 용기가 없어 훌쩍이며 반성의 편지를 썼습니다. 차마 마주 보고 전하지 못한 말들을 글로 적어 다음 날 등교 전, 슬쩍 안방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아버지는 편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우셨는지, 웃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 날 다시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모습에서 마음이 전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편지가 준 첫 고마운 기억이었습니다.
군 복무 시절, 요즘처럼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는 군대 분위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바깥세상에서 도착하는 편지가 위로이자 존재의 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편지가 기다려졌습니다. 다행히도, 그리고 과분하게도 많은 편지를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할아버지께서 보내주신 편지였습니다.
대학교 동기들이나 어린 여동생이 보낸 알록달록한 편지와 달리, 할아버지의 편지는 단순한 흰 편지지에 정성스레 적힌 글씨로 가득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캘리그래피 같은 멋들어진 글씨체로 쓰인 넉 장의 편지는, 그 내용이 너무도 애틋해 읽고 또 읽었습니다. 생전에 손자와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리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셨지만, 제대 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 결국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 했습니다. 편지를 떠올리니 문득 할아버지가 그리워집니다.
종이 편지를 쓰지 않는 시대지만, 저는 여전히 종종 손편지를 씁니다. 종이로 쓴 편지는 상대가 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마음을 더 밀도 있게 담을 수 있습니다. 다 적은 뒤 봉투에 넣고 봉인하며 전하는 설렘은 이메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지금은 인터넷 공간에 편지를 저장하는 것으로 타협하고 있습니다.
한때 거의 매일 상상 속 그리운 이에게 보내던 편지에는 계절, 일상, 바람(hope), 회고, 그리움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제 매일 편지를 쓰는 건 마치 기도와 같다고 느낍니다. 기도이자 회고이고, 묵상이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그만두면, 어쩐지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것 같은 그런 일.
'인간은 자신의 일기에도 거짓을 적는다'
오랜 크리스천인 친구가 새 가톨릭 신자인 제게 해 준 말입니다. 처음엔 언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곧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일기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내가 되고 싶은 나의 이상향을 꿈꾸느라 그랬던 걸까요. 저는 일기에 있었던 일의 의미를 과장하거나 왜곡해 적은 적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편지는 대체로 연인이나 가족, 혹은 멀리 있지만 마음이 가까운 친구처럼 인연이 깊은 이들에게 씁니다. 그립거나 애틋한 사람에게 그 마음을 담아 솔직하게 전하는 것이 편지입니다. 조금 과장될 수는 있어도, 수식어로 진실을 감추는 일은 오히려 어렵습니다. 편지는 차분하게 생각하고 적을 여지가 있으니, 더 신중한 언어 선택도 가능합니다. 일기를 쓰다가 틀린 부분을 찢어 버리지는 않지만, 편지는 적다가 틀리면 그 장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씁니다.
소녀 안네 프랑크가 나치 점령하의 공포 속에서 비밀 장소에 숨어 일기장 친구 ‘키티’와 대화하듯 써 내려간 <안네의 일기>는 현대인들의 필독서이자, 역사 되새김의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일기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안네가 편지를 보내는 대상은 무한한 상상 속에 존재합니다. 왜 하필, 편지였을까요?
어쩌면 안네 프랑크는 자신이 처한 비좁고 억압된 현실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쓰는 형식의 일기보다, 비록 상상의 존재이지만 자신보다 자유로운 ‘키티’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더 큰 해방감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녀의 기록은 독백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듯 풍성한 사색을 품고 있습니다. 원래 독백보다는, 잘 들어주는 친구에게 이야기할 때 더 많은 생각이 꽃을 피우기 마련이니까요.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것은 사람들의 진심은 정말 착하다는 것이다.
(Ondanks alles, omdat ik nog steeds aan de innerlijke goedheid van den mens geloof)
— <안네의 일기> 中
진심을 담은 편지는 그 자체로 강한 진정성을 갖습니다. 편지를 읽는 이는 단순히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진의를 느끼고 자신의 마음을 더해 해석하고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편지는 단순한 글을 넘어, 또 다른 교감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오늘 이 글을 쓰며 마신 커피는 '샷을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였습니다. 가을 공기가 좋아 오래 걸었더니 조금 덥고 목이 말라 시원한 것이 마시고 싶었고, 편지를 떠올리니 좋은 기억부터 후회의 씁쓸함까지 만감이 교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사 시간에 서로 한 '평화의 인사' 이후에도 마음은 썩 평화로워지지 않아 쓰디쓴 시원한 커피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편지로부터 한 성인의 외침과 그 반향을 알고, 나의 일상 속 편지로부터 그것을 계속할 의미와 의지 있음에 행복하고, 그럼에도 편지 속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한 많은 일들이 못내 아쉬운, 맑은 가을 하늘의 주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