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죽
혀와 입천장으로 눌러 넘기는 밥알.
간간이 존재감을 뽐내는 새알심.
키 작은 할머니가 시장 그 긴 거리를 왕복하며 들통에 담아 팔던 팥죽은 400원이었다.
적갈색 고무대야 두세 개를 터전으로 장사하던 아줌마들이 주로 사 드셨다.
'누구네 아들이 어느 대학 갔네', '누구네 딸이 시집 잘 갔네'.
시장에 널리 퍼진 여러 성공 수기는 억척같은 그들의 삶과 당시의 시장 경기를 대변했다.
녹색·흰색 알록달록한 그릇에 담긴 팥죽, 그 모양 만으로도 침이 고였건만,
장사할 시간 있어도 먹을 시간 없는 아줌마들의 후루룩 팥죽 먹는 소리는, 어린 구경꾼의 입 안에 홍수를 일으켰다.
지금 나에게는 ASMR이지만, 당시 꼬마에게는 OMG였다.
그 아이는 팥죽에 진심이었다.
익산
익산의 한 모텔에서 40대 중반, 14개월을 보냈다.
내 과거로 이루어진 차가운 법정에 영혼을 가두고, 나와 끊임없이 대화하던 시절이었다.
찬란했던 지난날에 비해 모든 게 열악하고, 불만이었던 시간이 쌓이며, 현실의 욕구는 짓눌리고 작아졌다.
마음의 지시에 얽매이다 보니, 가까운 편의점을 다녀오는 일조차 숨이 벅찰 만큼 몸이 무너져 갔다
하루 종일 앉아 지내니, 배변도 불편해졌다.
걸어야 했다.
몸이 성해야 마음도 성해진다는 걸 그제야 체감했다.
걸음을 세며 걷는 소심한 시도로 시작해, 점차 지도를 키워나가며 세상을 넓혔다.
그러다 새로 정복한 영토에서 팥죽 가게를 봤다.
보려 해서 본 게 아니라, 기가 쇠한 시장에 유독 그 집에서만 새어 나오는 활기가 시선을 당겼다.
문 앞에서 갈등하면 추해 보일까 싶어 우선 지나쳤다.
주머니 속 만원을 쥐었다 피길 반복하다, 마침내 움켜쥐고 가게로 들어갔다.
고민해야 할 가격이었지만, 나갈 배짱이 없어 주문했다.
떠오르는 사연·인물들을 애써 지우고 덮으며, 팥죽이 나오길 기다렸다.
다행히 긴 시간이 아니었다.
더불어 기대했던 맛도 아니었다.
남들은 맛있게 먹고, 기분 좋게 나갔지만,
내게는 썼다.
큰 이모
1996년 봄.
스무 살 초반의 나는 서른 초반 사촌형을 태우고 서울로 향했다.
"근처에 덕산병원이 있고, 우체국도 있대."
큰 이모가 내리시는 정류장에 관한 정보는 그게 다였다.
무슨 색깔, 어떤 버스를 타고 오시는지도 몰랐다.
출발하기 전에 전화번호부를 뒤지고 지도책을 펼쳐, 결국 목적지를 찾아냈다.
덕산병원도 있고 우체국도 있는, 서울 오류동의 모처였다.
정차한 택시 기사님에게 물어, 덕산병원에 우체국은 이곳뿐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두 시간 정도 일찍 간 건 확실하다.
형하고 당구를 쳤고, 밥도 먹었다.
도착 20분을 남기고 근처를 서성였다.
한 시간이 지났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집에 전화했다.
아직 이모한테 연락 오지 않았고, 덕산병원에 우체국은 맞다고 하셨다.
두 시간이 지났다.
시내버스만 오고 갈 뿐, 시외버스도 이모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집에 전화했다.
이모는 제시간에 도착하셨고, 엇갈릴까 봐 전화 못하시다가 멀리 떨어진 공중전화를 찾아 방금 전화하셨단다.
분명 흔하지 않은 병원 이름에 우체국이 맞았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형과 찢어져 그 부근을 한참 돌다, 혹시나 해서 지나던 택시를 세워 물었다.
"기사님! 근처에 우체국 있는 덕산 병원이 여기 말고 또 있나요?"
기사님은 잠시 더듬더니, 이내 '아!' 소리와 함께 답을 주셨다.
"가리봉동! 가리봉동에 있어요."
가는 길까지 친절히 알려주셨다.
4시간이 지나고,
어둑해져서야 도착한 그곳에,
얇게 입어 추워 보이시는 이모가 서 계셨다.
"오매 내 새끼들! 오지간 귀한 내 새끼들, 얼마나 고생 많았냐."
인천까지 가는 동안, 단 한 마디 원망 없으셨다.
진도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에,
엇갈려서 고생시킬까 봐 4시간 이상을 추위에 서 계셨음에도,
오로지 칭찬과 감사 인사뿐이셨다.
집에 도착해서도 엄마손을 붙잡고, 우리를 먼저 걱정을 하셨다.
"아야, 막내야! 언능 애기들 밥 맥여라. 나 때문에 추운 데서 점드록 배곯고 고생했시야."
다음 날 저녁,
이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팥죽을 끓여 오셨다.
내 인생 첫 기억 무렵부터 끓여주셨던 맛있는 팥죽.
춘분
필리핀에서 동업하던 이에게 당한 배신으로 모든 걸 잃었다.
돈, 신용뿐만 아니라 여럿이 복잡하게 얽혀있던 관계의 끈도 모두 풀려 사라졌다.
내 돈을 빼앗아간 그자와, 한순간 나를 등지고 그를 따르는 변절자들이 죽도록 원망스러웠다.
세상이 싫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연고 없는 익산에 숨어 지냈다.
혼자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심리의 제안에, 나를 따지고 나와 화해하려 했다.
조금씩 다시 살 작정을 하자니, 좋은 기억만 떠올려야 했다.
그렇게 생의 의지를 쌓아 나갔다.
어느 날, 조심스럽게 배신자와 함께 했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를 떼어낸 기억은 달콤하기만 했다.
그 기분이 나를 자신감으로, 또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그래서 팥죽 가게를 보게 됐고, 그래서 큰맘 먹고 들어갔다.
메뉴를 하나하나 훑는데, 뻔하디 뻔한 사진들이 갑자기 이상한 기운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 내 몸과 마음을 갈라 놓았다.
몸은 팥죽을 먹으러 들어와 있었지만, 마음은 이모가 사시는 차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모가 그리워졌다.
눈물이 눈물을 불러 홍수를 일으키던 시기였기에, 애써 외면하려 했다.
팥죽이 나왔다.
몸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마음으로 먹는 팥죽은 맛없었다.
몇 술 더 떴다간 울컥할 것 같아, 그 아까운 걸 남기고 문을 나섰다.
몸은 가게를 떠났지만, 마음은 추억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안에 갇혀, 나를 심판했다.
달콤한 기억으로 풍성했던 시절.
큰돈 벌며, 유감없이 쓰느라 정신없던 시절.
한국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가족들과도 연락이 뜸했던 그 시절에,
이모가 돌아가셨다.
내가 여전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걸로 아시고, 혹여 방해될세라 부모님은 연락하지 않으셨다.
내 탓이다.
사업이 어려워질 때마다 유난히 내색하며, 가족들의 근심을 키웠던 내 잘못이다.
벌고, 놀고, 먹느라 미리 재기를 알리지 못한 내가 죄인이다.
들숨의 찬바람이 입 안 팥죽 잔향으로 죄책을 가중시켰다.
걷고, 따지고, 성찰하며 심신을 살찌웠다.
한 달, 두 달 바람이 더 차가워지더니 담 결린 듯 가슴에 박혔던 회한이 풀어졌다.
연락 없이 고요하던 핸드폰이 모처럼 소식을 전했다.
"식사하세요. 문에 걸어놨어요."
모텔 주인 내외께서는 가끔씩 그런 식으로 음식을 나누셨다.
문을 열어 바깥 문고리에 걸려 있던 검은 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스테인리스로 된 찬합이 꽤 뜨거웠다.
손을 소매에 넣어 윗 칸을 열자마자 갇혀 있던 김이 뿜어져 나오고, 곧 적갈색 그것이 선명해졌다.
팥죽이었다.
절기로는 동지였고, 내 마음은 춘분이었다.
이모를 모시러 간 그 시절 봄날처럼, 아직은 춥지만 조만간 꽃이 필 춘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