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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춘기-시시각각 찾아오는 사춘기
11화
향기가 손을 내밀어
PROUST EFFECT
by
Sir Lem
Apr 14. 2025
세상 탓인지, 내 탓인지
어쨌든 서로 척지고 살던 시절이었다.
내가 걷는 길,
그 주위의 거슬리는 생물과 무생물이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고,
때로는 후각과 미각을 당기려 할 때마다,
그게 화해를 청하는 악수였는지,
결핍과 궁핍을 겪는 나를 향한 조롱이었는지 간에
나는 침묵했고, 무시했고, 그저 걸었다.
표현하고 싶지 않았을 뿐, 외로움은 사실이었다.
극도로 외로웠다.
그래서 괴로웠다.
난 걸었다.
세상과 나 사이의 마찰이나 반응이 아닌,
내 입에서 나는 숨소리와
근육의 역동이 만들어내는 양식만으로 버티며,
걷고, 또 걸었다.
뭉쳐진 외로움이 언젠가 폭발해
빅뱅이 되고,
감정의 인플레이션을 동반해 새로운 우주 속의 나에게 새 삶을 가져다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마냥 걸었다.
한 달, 여름, 가을
관심에 사슬을 더욱 동여매 주변은 더 희미해지고,
이제 내 갈 길만 또렷해지기 시작할 즈음,
바람이 차갑더니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되어 함께 춤추자며 나를 흔들었다.
들러붙어 털어내고, 아른거려 치워내고
잰걸음으로 서두르며 싫은 기색 내비치니
바닥에 드러누워 사각사각 구슬린다.
내 공간 다다라서 미련 떨치자며 매몰차게 짓밟으니
아득바득 소리 내 울더라.
나가지 않았다.
눈의 마음이 돌아서면,
그래서 차가워지고 얼음으로 변해야 나갔다.
눈의 표정이 바뀌면,
그래서 회색빛 진흙탕으로 변해야 나갔다.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졌는지
눈은 날 찾지 않았다.
오지 않았다.
경계를 풀고 밖으로 나가 다시 걸었다.
바람이 변했다.
간지럽혀 웃기려 하고 온기 담아 안으려 한다.
옷을 여며 정색하니
냄새를 뿌린다.
멈칫 둘러보니 향긋한 모습.
추파를 던지는 꽃, 바람이 건넨 꽃의 구애 편지
고개 숙여 주머니를 뒤졌다.
버린 게 아닌데 버려졌다 여겼는지
구겨진 인상
.
미운 게 아닌데 오해하고 삐졌는지
토라진 얼굴
.
버린 게 아닌데 버려졌다 여겼는지
미운 게 아닌데 오해하고 삐졌는지
어둠 속에 박혀 있던 흰 마스크
다독이고 손잡았다.
함께 만든 입김으로 화해도 했다.
뿌듯한 기분에 날랜 걸음으로
다른 길을 걷는다.
더 걷는다.
숨소리가 들리고 숨 냄새는 반갑다.
마음 놓인다.
신호등 옆 멈춰 서서 귀를 세운다.
큰 날숨 내쉬고 코로 맡는다.
멈춰 서고
귀를 세우고
코로 맡는다.
또각또각 박자 맞춰 다가오는 소리
내 옆에 멈춰 선 여인
그녀의 향수
그 향기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향기
대학 시절 인생 첫 소개팅 하던 날 뿌렸던 향수
누나 방에 있던 향수
기대와 설렘의 그 향기
마스크를 벗고
천천히 걸었다.
카페를 지나치며 만난 뱅쇼 향기
캐나다 출장 가서 머물던 어느 호텔 로비의 향기
성공과 확신의 그 향기
더 늦춰 걸었다.
서점 열린 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책의 향기
대학원 시절 논문 자료 찾던 도서관에서의 향기
열정과 집념의 그 향기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주택가를 지난다.
멸치 꽈리 볶음의 향기,
엄마가 해주시던 반찬.
청국장의 향기,
청국장 싫어하시는 아버지 안 계실 때
엄마와 나만 먹던 별미.
보고 싶은 가족의 그 향기
지금 나를 미안하게 하는 향기
슬프게 하는 향기
다시 일어서게 하는 향기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나를 벗었다.
버려진 게 아니었고 내가 버렸다
미운 건 나였는데 오해했었다.
어둠으로 걸어갔던 나
변함없이 밝은 세상
마스크로 눈물을 닦았다.
잘 보이고, 잘 들리기 시작하더니,
채우기 위해 쑤셔 넣었던 게 아닌
먹고 싶은 걸 찾고 있다.
보이지 않던 빵집이 보이더라.
단팥빵이 보이길래 몇 개 주워 담고,
꽈배기 튀기는 소리가 들리길래
그놈도 넣었다.
그렇게 세 봉지를 샀다.
지내던 모텔로 돌아가는 길에
날 향해 손 흔드는 편의점 주인 아주머니
“어디 갔다 와?”
비닐봉지 하나를 건네며 그녀에게 처음 문장으로 답한다.
“꽈배기하고
단팥빵 사 왔어요. 드세요”
입술을 문 채 나를 보며 웃으시고,
“아저씨 금방 나오니까 같이 먹어야 겄다.”
모텔에 도착해 처음으로 소리 낸다.
“사장님!, 사모님!”
먼저 나오신 아주머니.
“어서 와. 청소 깨끗이 해놨어.”
뒤따라 오신 사장님을 가리키며 말을 이으신다.
“우리 아저씨가 의자도 편한 놈으로 갖다 놓고”
봉지와 함께 그들에게도 첫 문장을 건넨다.
“꽈배기하고
단팥빵 사 왔어요. 드세요”
두 분 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웃으시고,
“밥하기 싫었는데 잘됐구만.”
다시 생각하고, 말하고, 나눴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상으로의 환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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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춘기-시시각각 찾아오는 사춘기
09
두 내외(內外)
10
팥죽
11
향기가 손을 내밀어
12
충치 미학
13
관상+동맥
다춘기-시시각각 찾아오는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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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을 오래 기억하고, 상처를 오래 들여다 보는 놈이다. 그래서 쓸 수 있는 글이 있고, 그래서 이렇게 붙들고 앉아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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