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보기 힘들던 그 시절의 시애틀
1988년 한국에서는 올림픽이 한참 열리고 있었다
당시 미국 온 지 몇 년 안 된 상황에 열심히 돈을 모아 산 첫 중고차로 친구와 함께 미국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미국 온 지 벌써 3년이 되어가지만 늘 가본 곳은 LA인근뿐, 저 산 너머로는 뭐가 있을까? 50개 주는 다들 어떻게 살까? 한국에서 외화로 보던 '초원의 집'같은 미국 시골은 아직 남아 있을까? 한참 호기심이 많던 나이 우리들은 차를 끌고 미 서부를 방황하기 시작했다. 맞다 여행이란 표현보다는 방황이 더 적절한 당시의 우리의 모습이었다.
내비게이션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주유소에서 $2를 주고 산 미국 지도를 보고 그중 큰 도시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LA의 북쪽의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고 미 서북부 끝자락에 있는 시애틀이란 도시를 향했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덕분에 이제는 누구나 아는 도시이지만 당시만 해도 시애틀은 처음 들어보는 도시 이름이었고 그나마 지도에 크게 표기된 덕분에 아무 이유 없이 목적지로 정해 버렸다. 지금은 미국 내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로 LA 광역시, 뉴욕 광역시, 시카고 광역시 그다음으로 시애틀과 타코마 광역 지구가 4번째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이다.
당시에는 미국 이민을 오면 LA 아니면 뉴욕이었다. 지금도 LA지역은 압도적인 한인 숫자로 뉴욕의 2배 가까운 한인들이 살고 있고 당시에는 두 도시를 제외하고는 한국인들을 만난다는 건 힘든 일이라 생각했다. 물론 여행을 다니면서 생각 외로 미국 방방 곳곳에 여러 사연을 가진 한국인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 건 차후의 일이었다.
시애틀 인근에 와서 갈증에 음료수를 사고자 동네 마켓에 들렸다. 카운터에 있는 분은 직감적으로 한국인이라 생각이 들었다. 당시 LA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하던 비즈니스는 마켓과 세탁소, 워낙 많이 보던 모습이라 대수롭지 않게 마켓을 둘러보며 간식거리와 음료수를 고르고 있었다.
마켓 주인아저씨가 우리를 열심히 꿰뚫어 본다. 왜지? 우리가 물건이라도 훔치게 생겼나? 약간은 불편한 시선을 뒤로 한채 물건을 고르고 카운터에 계산을 부탁한다. 주인아저씨가 소심하게 물어본다.
Where are you from? (어디서 오셨지요?)
Korean이라고 대답하자 아저씨의 심각했던 모습이 미소로 바뀐다.
"한국분이셨어요? 어디서 오셨어요?"
LA에서 왔다고 하고 미국을 여행 중이라고 설명을 드렸다. LA에서 워낙 많은 한국사람들과 지내왔던 차라 별 감흥이 없던 우리와는 달리 주인아저씨는 한국인들 만났다는 게 너무나 흥분되는 일이었나 보다.
쉬지 않고 질문을 던지시는 아저씨, LA는 한국사람이 많냐? 짜장면 파는 곳은 있냐? 거기도 한국인 마켓 주인들이 있냐? 인종차별은 어떤가? 등등. 가게는 뒤로하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쉬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시애틀에 정착한 주인아저씨로서는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산다는 LA의 이야기는 고국 이야기만큼이나 궁금했을 것이다.
"우리 집이 가까운데 오늘저녁 우리 집에서 저녁도 먹고 잠도 자고 가요"
처음 본 우리에게 선뜻 묵고 가라고 제안을 하신다. 조선시대 한양길 가던 선비도 아닌데 나그네는 묵고 가라니? 아저씨의 제안에 한걸음 뒤로 주춤해졌다. 나중에서야 그 마음이 와닿았지만 갑작스런 제안에 그때는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조심스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아저씨는 매우 실망한 눈치였다. 마켓을 나서는데 바리바리 음료수와 간식등을 챙겨 주신다.
아저씨를 뒤로 한채 시애틀 다운타운에 가서야 어릴 때 백과사전에서 보던 '스페이스 니들'이 있는 곳이 시애틀임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며칠간 서운해하시던 마켓 주인아저씨가 생각이 났다. 그냥 그 집에서 하루 묵고 갈걸 그랬나? 하지만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그 마켓을 도로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70년에 LA한인타운도 한인들이 귀하던 시절 친구를 만들고자 한국 식당에 가서 밥을 먹다가 동년배쯤 돼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면서 친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렇게 만나서 몇십 년째 친하게 지내는 분들도 몇 분 봤다.
요즘 같으면 낯선 사람이 식당에서 말을 걸면 의심부터 할 것이다. 이상한 종교 포섭인가? 혹은 사기라도 치려는 건가? 그나마 그 정도면 다행이다. 술집에서 눈이 마주쳤다고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났다는 이야기는 이제 교민 사회에서도 종종 들려오는 뉴스이다.
사람이 귀하면 만남도 귀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사람의 소중함을 모르게 됐다.
허허벌판 사막에서 사람을 만나면 반가움 보단 두려움이 먼저라고 한다. 인간의 본능이라고 한다. 하지만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되고 더더욱이 어떤 동질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는 순간 그보다 더 큰 위안이 될 수는 없다고 한다.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투사는 아니지만 품 안에 태극기라도 품고 있다가 여행하면서 만난 분들께 나눠 드렸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미주 한인 260만 명의 시대이다. 교민은 흔해졌지만 사람 하나하나가 소중하던 그 시절의 이민야사(移民野史)는 없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