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ive me truth
May 04. 2020
나에게 새로운 시작은 아마도 해보지 못한 일에 대한 귀찮음이었다. 시작의 시작은 지금 덮고 있는 이불부터 걷어차 버리는 일처럼 간단하지만 우물쭈물 거리는 일이 되어 버렸다. 새로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두려움, 어색함, 걱정스러움 보다 어쩌면 단순히 귀찮음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일을 추가하지 않은 이유는 권태 속에 자리 잡은 편안함을 위해서였다. 새로운 시작 하는 데 있어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지만 명확한 이유가 항상 존재했다. 반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수십 가지가 존재했다. 먼지 같이 가벼운 이유들은 또 다른 가벼운 변명들과 함께 뭉쳐지다가 젖은 솜처럼 결국 나를 무겁게 만들어 짓눌러 버렸다.
그럼에도 시간은 나의 변명들을 기다려 주었다. 나의 주저함에 대한 툴툴거림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시간이 약이다. 란 말은 처럼 늘어난 다짐이 1월 1일마다 써버린 다이어리처럼 쌓여버려서 연도만 없으면 언제 한 다짐 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 그냥 하자.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선택을 하자. 나의 새로운 도전은 나의 선택을 바로 실행에 옮기는 일로 시작했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만났다. 노란색 화살표만을 따라 걷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례길, 간단했고 내 가슴을 뛰게 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비행기표를 샀다.
나는 스페인으로 떠났다. 떠나야 할 이유는 하나 '가고 싶다.' 떠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또 다른 이유들을 가져온다. 그래서 하나의 이유만을 가지고 떠났다. 홀로 배낭을 메고 떠난 여행, 거기까지 가는 데 있어서 나는 앉아만 있으면 됐다. 비행기와 기차가 알아서 나를 데려다준다.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낯선 땅에 선 순간 돌아갈 곳은 없고 이제 나아갈 길만 남았다. 앞을 바라보고 한 걸음 떼는 일부터 시작이다. 인생에서 주저하는 순간 기회는 사라져 버렸고 심지어 잊혔다. 하지 않으면 편했으니깐 마음은 불편하지만 불확실한 일이 펼쳐지지 않았기에 안주할 수 있었고 물론 거기서 행복감도 느꼈다.
그럼에도 새로운 경험에 대한 시작 없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는 없었다. 처음 시작했던 일도,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불편함을 익숙함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까지는 꼬박 30일 정도를 계속 걸어가야 했다. 모든 일이 시간이 흐르면 몸에 익듯이 매일 30km 정도 걷는 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져 갔다. 항상 좋은 날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걷는 일상 속에서 항상 새로운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길 위에 놓였기에 두 발을 움직였다. 마치 퇴근 후 그날 밤 내일 출근을 준비하는 것처럼 내일을 위해 오늘을 걸었다.
새로운 세상 속으로 향했던 건 결국 새로운 나와 과거의 나를 만나게 해 주었다. 비틀거렸던 시간들 속에서도 버텨냈던 나에게 위로해주었고 주저하고 나아가지 못했던 나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순례길 위에 놓인 나에게 파울로 코엘류의 소설 '순례자'처럼 초심자의 행운과 더불어 온 세계가 나를 도와주었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모든 자연과 사람들이 나의 도전에 응원해 주었고 같은 꿈을 꾸며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해주는 동행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계단에 선 인생에서 한 걸음 올라가던 내려가던 움직이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내 앞에 나타난다. 내려가기 무서워 가만히 있었으면 보지 못했을 새로운 풍경들이 펼쳐졌다. 그동안 무엇이 나를 그렇게 주춤거리게 했는지 이 길을 걷는 동안 나는 그동안의 내가 우스웠다. 나를 들어 새로운 곳에 떨어 뜨려 놓으면 그 속에서 항상 답을 찾았으면서 왜 그렇게 겁을 내었는지 말이다. 불편함을 익숙함으로 만들어 버리고 내 발로 출발선에 서는 순간 내가 걸어온 시간들이 나를 멈추지 않게 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넘어지던 뒤쳐지던 시작을 한다면 그 모든 것들은 의미 있는 일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