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솔은정 Jul 21. 2024

오늘만 살 것

처음 본 듯, 마지막인 듯

2021.12


그이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제주도 여행이었다.

늘 해외출장이 많아  많이 돌아다닌 거 같지만 제주도는 딱 두 번 갔고, 

여행다운 여행은 기억에 없다고 그런다.

잘 걷지 못하는 그와 어찌 가나 고민하는데 은주가 전화가 왔다.

함께 가자고, 은주 남편이기도 하고, 학교 선배이기도 성렬오빠가 전문가다운 모습으로 케어해 준다고 

걱정 말라고 한다. 

 은주가 배까지 다 표를 예매해 놓았고,  성렬오빠가 차를 몰고 다니니 걱정 말라고 해준 덕에

우리 부부는 녹동항에 차를 세워놓고 그 앞에서 하루 자고 아침 배를 타기로 했다.

평일에 시간을 빼서 우리와 함께 해준 은주 부부에게 정말 고맙고 고마웠다.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잘 걷지 못하는 그를 성렬오빠는 고맙게도 세심하게 보살펴 주었다.

밥도 잘 먹지 않던 그가 고기도 조금 먹고,

수영장에선 아기처럼 큰 소리로 웃기도 하고,

대학시절로 돌아간 거 같다고 자기 전에 그이가 내게 너무 고맙다고 그런다.

지금 이 순간 좋다고,

평생 아끼느라 아주 비싼 식당에서 밥 한 번 먹지 못했던 그에게

은주 부부와 우리 좋은 곳에서 밥 먹자고 했더니 흔쾌히 그가 수락해서

파인 다이닝을 예약해 갔다.

그가 연신 좋다고 해서 나도 좋았다.

미래는 생각하지도 말고, 과거는 돌아보지도 말고

지금 이 순간만이 우리에게 참 행복하다는 사실로 많이 웃을 수 있었다.

다음 날 배를 타고 와야 하는데

일부러 방을 따로 예약해 준 은주네 부부에게 미안하게끔

그이는 방이 답답해서 있을 수가 없다고 해서

추운데 성렬오빠가 바깥에서 계속 그이와 같이 있어주었다.

은주네 부부는 녹동항에서 창원으로 갔고,

그이는 항암제를 먹는 날이라 녹동항 앞 숙소에서 약을 먹고 자고 다음 날 집으로 가기로 했다.

별 탈 없이 여행 잘 마친 것에 감사하고  약도 잘 먹어 감사하며 잠들었다.


녹동에서 아침 8시 반 출발. 전주에 열한 시 넘어 도착했다.

집에 도착해서 피곤하지만 짐 풀자마자 다 정리하고 빨래 돌리고,  밀린 일 처리했다. 

그이와 여행을 다닐 때 나는 짐을 꾸려본 적이 별로 없다

언제나 짐을 꾸리고, 다녀와서 짐을 풀고 정리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짐 싸는 걸 몇 번 하려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된다는 걸 그이도 알게 되었다.   


집에 오자마자 리클라이너에 앉아 계속 자던 그이가

오후에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해서 손 붙잡고 같이 호흡을 했다.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쉬고.

아무렇지 않게 숨 쉬는 일도 감사할 일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이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건 

우리도 조금씩 알고는 있지만.

우리 부부는 아직 수용이 잘 되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만 잘 살아보자고 했다

오늘 하루 처음 본 듯 그리고 마지막 인 듯이


집에 오니

날 기다리는 일과들이 있음에 감사.

부엌과 냉장고를 정리하고

다음 주에 할 수업 스케줄 정리하면서 또 감사.

나의 체력과 마음의 평화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어서 감사

그런 마음 들게 해 주심에 감사.

이전 22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