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
그이의 후두엽에 생긴 암세포를 치료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더 해보자고 한다.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기는 힘들고, 한 달 가까이 있어야 해서 우리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추천을 받아
광교 근처의 암요양병원에 함께 입원하기로 했다.
나도 암 수술 이후 한 번도 제대로 암요양병원에 입원해 본 적도 없어서, 환자로 입원해서 그이를 간병하기 위해 그이와 같은 병실에 입원하는 조건으로 함께 입원하기로 했다.
예전 발산동 암요양병원에서는 남녀가 유별해서 절대로 한 병실에 안된다고 해서 그때 일주일 정도 고생한 기억이 있는데 이곳 병원에 부부인데 왜 안되냐며 같은 병실을 주니 진짜 좋다.
세끼 밥도 주고, 함께 호텔 같은 병실이라 여행 온 거라 생각하자 그랬다.
힌 달 정도 입원해야 해서 아이들 먹을거리도 좀 정리해 놓고, 집안 일도 정리하고,
무엇보다도 그이가 원하는 일 중 하나인 가족사진을 찍기로 했다.
리마인드 웨딩콘셉트로 함께 결혼사진처럼 찍고, 넷이서 근사하게 옷 차려입고 찍는데
사진사가 조용히 다가와서 묻는다.
" 남편 분 혼자서 멋지게 찍어드릴까요?"
그리고 그이 혼자서 멋진 턱시도우 사진도 찍었다.
저녁에는 태국식당에 가서 맛있는 식사도 나누고,
엄마 아빠 없어도 두 딸은 잘 지낼 거라고 우리에게 걱정 말라고 해주었다.
재경과 윤서는 요리도 잘해서 먹고, 플레이팅도 예쁘게 해서 사진으로 잘 지내고 있음을 보여주니
걱정은 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딸들을 그리워할 뿐이다.
둘이서 밥 차려서 보내는 사진을 보는 게 그이 낙이다.
저녁마다 둘이서 뭘 먹는지 사진 보내오는 재경
“오우. 재경. 정갈하게 잘 차려 먹으니 기특하고 이뻐~.”
“당연하죠. 엄마에게 잘 배웠는데~.”
둘이서 잘 지내주는 것만으로도 엄마 도와준 거야.
오늘 엉덩이에 맞는 면역주사 맞는데 아프길래
"왜 이렇게 아파요?"
차가운 곳에서 꺼낼수록 유난히 아프다고 그런다
간호사선생님에게
“남편 주사는 다음에 냉동실에서 꺼내주실래요?”
했더니 엄청 웃으시며
자기 남편 좀 우찌 해야 하는지 묻는다.
내 남편 하나도 힘든데 선생님 남편은 직접 처리하시라고 했다.
저녁이면 나는 줌으로 수업 몇 개를 해야만 했다.
내가 수업하는 것을 방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그이가 바깥으로 나가는데 조금 불안했다.
그이는 요즘 방향감각이 없어져서 방을 잘 못 찾는데
수업 중이라 따라가지도 못하고, 그냥 수업하고 있다가
바깥에서 큰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그이가 다른 여자 환자 방에 들어가 그 방에서 소란이 난 거다.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이와 화가 난 환자 분 사이에서 울고 싶었다.
"나 수업하는 동안 조금 기다려 달라니까 왜 나갔어?"
"애들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어, "
환자분께 정말 죄송하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그분이 심장마비에 걸릴 뻔했다면서
화를 누그러뜨리질 않으시길래. 결국 병원 관계자들이 오고 중재에 나섰다.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부부가 모두 암환자이고, 남편이 뇌암이라 지금 상태가 안 좋아
인지가 좀 떨어져 방을 못 찾은 거라고 이해시켜 간신히 소란이 가라앉았다.
울고 싶고, 남편에게 너무나 화가 나기도 하고, 너무나 가엾기도 해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그이가 내 옆에 와서 주눅 든 얼굴로 앉는다.
"미안해.. 내가 너무 바보 같지.. 애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어."
그 마음을 왜 모를까?
딸바보인 그는 매일 사진첩으로 딸들 사진을 보고 있는데
얼마나 만지고 싶고, 실제로 쳐다보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을까?
병원에 있는 동안 수업을 안 하면 되는 건데.
결정을 내려서 당분간만 쉬기로 했다.
그리고 그이 언어치료 때문에 시작한 사이버대학 언어치료공부도 쉬기로 했다.
뭣이 중헌디! 잠깐 잊었다.
지금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닌데.
그날 저녁 전화해서 양해를 구하고 병원에 있는 동안은 모든 수업 일정을 쉬기로 했다.
일이 없어지는 불안보다, 그이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더 크다.
덕분에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을 다 잊어버리게 된다.
토요일은 아무런 병원 일정이 없다.
아침 먹고 오늘은 광교호수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걸으면서 그가 자꾸 휘청거리고 발뒤꿈치를 들고 까치발로 걷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느냐 물어보니
자기 의지대로 잘 안된다고 한다.
천천히 걷고 발에만 집중하면 뒤꿈치를 내리게 되는데
걷다 보면 계속 까치발로 걸으면서 관절이 구부러지고 앞으로 자세가 숙여진다.
중간에 멈춰서 앉아 심호흡하고
다시 천천히 걸어서 병원으로 와 점심 먹고
그이는 한숨을 자고 일어났다.
두통이 있고, 무기력해진다고 하길래
병원 1층에 있는 카페에 앉아있자고 했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도 나오고
커피내음도 나고
토요일이라 딱 세 명(사장님, 나, 그이)
한적한 토요일 오후 좋구나.
이렇게 둘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아본 적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