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레이크와 엑셀 사이
[늘 을의 자리에서 자기를 ‘ 하대'하는 사람들의 말과 태도를 오랫동안 참아온 사람은 어느 순간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대한 무례함에도 무뎌지게 되고, 때로 스스로를 무례하게 대하기도 한다.]
- 보통으로 사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 자림
직장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로 ‘돈’, ‘사람’, ‘일’을 많이들 꼽는다. 그중 회사를 선택하는 이유는 대부분 ‘돈’이지만, 회사를 떠나는 이유는 대개 ‘사람’이다. 그만큼 사회생활의 핵심은 ‘관계’다. 긍정적인 관계는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지만, 부정적인 관계는 사기를 꺾고 조직 자체를 흔들기도 한다. 특히 사회 초년생 시절의 강렬한 경험은 이후 태도에 깊은 영향을 남긴다.
동해시로 외근을 나갔다가 서울로 복귀하는 고속버스 안에서의 일이었다. 거래처와의 저녁 자리에서 몇 잔을 기울인 뒤, 선물 받은 마른오징어를 한 축씩 들고 선배와 함께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선배의 주정이 시작됐다.
“야, 이 XX야! 이런 XX 같은 놈들아!”
술자리와 버스 안의 구분도 못 한 채, 선배는 욕설과 고성을 쏟아냈다. 아직 출발도 안 했는데, 세 시간 넘는 여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두운 차 안, 대부분의 승객은 조용히 휴식을 취하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선배의 주정 때문에 나는 혼자만 분주했다. 욕설이 터질 때마다 주변에 고개를 숙이고, 선배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좀 조용히 갑시다!”
승객들이 몇 번 소리쳤지만, 한 시간이 지나자 그마저도 사라졌다. 모두가 체념했는지, 아니면 나를 안쓰럽게 여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한 승객이 선배에게 말했다.
“사람 귀한 줄 아세요.”
낯선 사람에게 처음 받은 위로였다. 그땐 이런 상황도 사회생활의 일부라 생각했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니까, 다들 이렇게 견디며 사는 줄 알았다.
이후 사회생활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병약한 자존감 탓에 나서는 대신 늘 수긍했다. 그래서 야근은 내 몫이 되었고, 다른 이의 일도 떠맡았다. 늦은 밤까지 책상에 남아 있는 일이 일상이었다. 회의 시간에 “얘한테 그만 좀 몰아줘”라며 날 감싸주는 선배도 있었지만, 나는 늘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믿었다.
직급이 올라간 뒤엔 상황이 더 나빠졌다. 무능한 상사가 떠넘긴 무리한 일들이 팀원들에게 몰렸고, 그 무게는 고스란히 내 어깨로 옮겨졌다. 이제는 나만의 고생이 아니라, 후배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까지 더해졌다.
언제부턴가 ‘참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식이 됐다. 실제로 많은 문제들이 그렇게 해결되었고, 나는 기꺼이 나를 희생했다. 처음엔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지만, 반복될수록 자존감은 조금씩 깎여 나갔다. 무례함에 무뎌졌고, ‘내가 하는 일이 원래 이런 거지’라며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기 시작했다. 아마 그게 우울의 씨앗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족 안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위계는 현실이다. 갑과 을의 구조는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어느 날 갑자기 ‘갑’의 자리에 오르기는 어렵다. 설사 오른다 해도 자칫 ‘갑질’로 비춰질 위험이 있다. 물론 거절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겐 그 한마디가 참 어렵다. 몇 년 전 퇴사 후, 밥을 먹자던 선배에게 말했다.
“퇴사까지 했는데, 그 자리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뒤 며칠을 걱정했다. 기분 나빴을까? 상처받진 않았을까?
퇴사도 했고, 우울증도 겪었는데, 나는 여전히 ‘을의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건 단순히 몇몇 사건이나 환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회의 관행은 쉽게 바뀌지 않고, 나 역시 그 안에서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사람 고쳐 쓰기 어렵다는 말처럼, 나도 쉽게 바뀌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번에 해오던 나만의 방식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이 내 뜻대로 바뀌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다. 그래서 상처받지 않는 ‘기준’을 만들기로 했다. 나는 본래 거절을 잘 못한다. 그게 마음 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런 것까지 받아야 했나 싶은 일들도 있었다. 감당 안 되는 술주정, 무리한 업무는 애초에 거절했어야 했다.
결국 문제는, 내가 마음의 타격을 허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선을 만들고, 그 선을 넘는 순간에는 단호해지는 태도. 내가 나를 존중하고, 그 존중을 해치는 관계는 ‘선을 넘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선만 잘 지켜도 되는 거였다. 모두와 잘 지낼 이유도, 모두에게 착할 필요도 없었다.
가수 아이유는 “악플에 상처받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런 시선도 있지만, 사랑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배우 박해일은 드라마 촬영장에서 아이유에게 막대했다고 고백하며, 그녀의 콘서트를 다녀온 뒤부터는 괜히 어렵게 느껴졌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진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그런 아우라가 생긴다.
자존감이란 결국, 외부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힘이다. 내가 만들어낸 나를 내가 사랑하고, 그대로 보여줄 때 생기는 에너지.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딴엔고군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