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 '을' 같은 생활
[늘 을의 자리에서 자기를 ‘ 하대'하는 사람들의 말과 태도를 오랫동안 참아온 사람은 어느 순간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대한 무례함에도 무뎌지게 되고, 때로 스스로를 무례하게 대하기도 한다.]
- 보통으로 사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 자림
동해시로 외근을 나갔다가 서울로 복귀하는 고속버스였다. 거래처와의 저녁 자리에서 반주라며 권유받은 술을 마셨더니 얼큰하게 취했다. 선물로 받은 마른오징어 한 봉지를 들고 선배와 함께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선배의 주정이 시작됐다. “야, 이 XX야! 이런 XX 같은 놈들아!” 그는 버스 안인지, 술자리인지 구분도 못 한 채 고성방가와 욕설을 퍼부었다. 아직 버스가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서울까지의 긴 여정이 벌써부터 고행처럼 느껴졌다.
당시 동해에서 서울까지는 3시간 30분이 넘게 걸렸다. 차 안은 어둡고, 모두 피곤한 얼굴로 휴식을 취하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선배의 주정 때문에 나는 혼자만 분주했다. 욕설이 쏟아질 때마다 주변 승객들에게 사과를 반복했고, 그런 선배를 진정시키려 나만 애썼다. 주변 승객들도 처음엔 조용히 부탁했지만, 한 시간이 지나자 그마저도 체념한 듯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내가 안쓰러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마침내 서울에 도착했을 때, 한 승객이 선배에게 말했다. “사람 귀한 줄 알아요.” 진땀이 났지만 모르는 사람에게서 처음 받아보는 위로였다. 사회 초년생 시절의 나는 이런 게 당연한 사회생활인 줄 알았다.
그 이후도 사회생활은 비슷하게 흘러갔다. 병약한 자존감 탓에 나서는 대신 주로 수긍했다. 그러다 보니 야근은 늘 내 몫이었고, 일을 대신 처리하기도 하며 늦은 밤까지 고된 하루를 보내는 일이 일상이 됐다. 회의 시간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제 그만 좀 몰아줘.”
라고 나를 대변해 주는 선배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늘 웃으며 “괜찮습니다”라고 답했다. 왜냐하면 그게 내 마음이 편해지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직급이 올라가니 상황은 더 나빠졌다. 무능한 상사가 가져온 무리한 일들이 팀원들에게 몰렸고, 그 무게는 고스란히 내 어깨로 올라왔다. 나는 더 이상 내 고생만을 걱정할 수 없었고 동료와 후배들까지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해졌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참는 것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기꺼이 나를 희생했다. 처음엔 나름대로 의미를 찾으려 했지만, 반복될수록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하찮게 여기는 습관이 자리 잡았다. 그렇게 나는 무례함에 무뎌졌고,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스스로를 하대하며 자책했다. 결국 이런 삶이 나도 모르게 우울증의 씨앗이 되었던 것 같다.
거절은 해결책일까?
가족 안에서도, 직장에서도 위계질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갑과 을의 관계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곤 한다. 느닷없이 갑의 자리에 오르기도 어렵고, 오르더라도 갑질을 한다는 비난을 받기 쉬운 세상이다.
물론 거절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거절은 더 힘든 일인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퇴사 후 밥을 먹자는 선배에게 “퇴사까지 했는데 불편한 자리에 가기 싫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며칠 동안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을까 걱정하는 일도 있었다 우울증과 퇴사까지 겪고 나서도 여전히 을의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단순히 거절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요한 건 그 뒤에 내가 얼마나 나를 존중하느냐이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아우라를 만들자.
근본적인 문제는 자존감의 결여에 있다. 자존감은 곧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다. 내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긴다면,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갑의 위치가 아니라도, 나만의 아우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버스에서 고생하거나, 모든 일이 내게 몰리는 일은 줄어든다.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선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자.
먼저, 자신을 칭찬하는 습관을 들이자. “오늘의 나는 잘했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보자.
두 번째,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자. 쓰면서 느끼고,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면 나를 더 아끼게 된다.
세 번째, 목표를 작게 나누고 성취를 경험하자. 작은 성공이 쌓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커진다.
나를 알아가는 방법은 다양하니까. 책을 찾아 읽어 보는 것도 방법이다.
자존감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무례함에 대처할 힘이 생긴다. 언젠가는 갑 같은 아우라를 가진 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함부로 흔들리지 않는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