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자동합계

by 케빈은마흔여덟

프롤로그


직장 생활 17년, 내 인생의 절반은 엑셀 시트 위에서 흘러갔다. 처음엔 그저 일 시키기 좋은 도구인 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묘한 매력이 있었다. 복잡한 수식이 딱딱 맞아떨어질 때의 쾌감이란! ‘엑셀 만든 사람에게 노벨 평화상을 줘야 한다’는 농담에 누구보다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그 촘촘한 행과 열 사이에서 청춘을 보냈다.


하지만 인생은 엑셀처럼 '자동 채우기'가 되지 않았다. 준비되지 않은 퇴직은 예고 없이 들이닥쳤고, 도망치듯 회사 문을 나섰을 때 내 손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20년 가까이 금융기관에서 대출 심사와 보고서만 만져온 나에게 세상 밖은 너무나 낯설고 냉정한 곳이었다. 특별한 기술도, 든든한 자본도 없던 마흔 중반의 가장. 내게 남겨진 마지막 카드는 아이러니하게도 직장생활 내내 손때 묻히며 다뤄온 '엑셀 실무 능력' 하나뿐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남들 따라 유튜브도 기웃거리고 성공 방정식도 외워봤지만, 결과는 매번 '#REF!(참조 오류)' 같은 실패였다. 다시 엑셀로 돌아와 책을 써볼까 싶어 도서관에 갔을 때는 더 큰 좌절을 맛봐야 했다. 시중에 나온 방대한 이론서들 앞에서 내가 아는 실무는 한낱 데이터 조각에 불과해 보였다. '엑셀 책은 전문가나 쓰는 거지, 나 같은 사람이 감히'라는 의문이 발목을 잡았다.


그 막막한 시기에 나를 숨 쉬게 한 것은 의외로 타인의 삶을 담은 에세이들이었다. 우주 속 행성 같이 저마다의 속도로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터질 듯 불안하던 심장이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갑자기 많아진 시간도 나를 돌아보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내 품에 쏙 들어오던 아이는 어느덧 훌쩍 커버렸고, 슈퍼맨 같던 아버지는 병환으로 작아진 뒷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거울 속에는 그 세월을 견뎌온, 조금은 지친 내가 서 있었다.


어느 날, 한 철학 강의를 듣다 무릎을 탁 쳤다. "철학은 지식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여야 한다." 그 순간,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엑셀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거창한 진리는 아닐지라도, 내가 평생 다뤄온 이 차가운 도구를 '삶을 바라보는 따뜻한 창'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전문가의 화려한 함수는 아닐지라도, 삶의 굴곡을 겪어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일리 있는 시선'은 담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엑셀 시트를 펼쳤다. 이번에는 상사의 승인을 받기 위한 보고서가 아니라, 내 삶을 읽어내기 위한 기록을 시작했다.


이 책은 엑셀의 기능을 완벽하게 가르쳐주는 교재가 아니다. 오히려 차가운 기능을 빌려 뜨거운 삶의 이야기를 전하는 고백에 가깝다. 엑셀을 다루며 오늘을 버텨내는 평범한 당신에게, 이 글이 "당신의 삶도 꽤 괜찮은 합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공감의 메모가 되기를 바란다.

엑셀 입문을 돕는 가장 다정한 인문학이자, 삶을 다시 배우는 한 가장의 기록. 이제 첫 번째 셀을 채우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월요일 연재
이전 10화가을색 플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