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05일, 수>
“야, 그래도 너 오는 날에는 반찬 가짓수가 늘어.”
수요일 저녁에 본가에 들른 지도 어느덧 1년이 되어 간다. 부모님 건강을 챙기겠다는 핑계로 가지만, 사실은 잘 차려진 밥상 덕에 내가 더 건강을 챙기고 있다. 누나에게서 내가 올 때면 저녁상 차림이 다르다는 말을 들었다. 막내아들이 온다고 모친이 반찬에 더 신경을 쓰신다는 것이다. 나는 간단히 먹어도 괜찮지만, 모친의 마음은 늘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 새로 지은 따끈한 밥, 푸짐한 찌개까지… 매주 막내를 위한 한 상을 차려주신다.
혹시라도 굶을까 걱정이 되어서일까. 내가 배불리 먹는 모습을 보며, 당신의 허기를 대신 채우시는 걸까. 부모의 사랑이라는 건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다.
오늘도 그 사랑을 한 그릇 깨끗이 비우며, 숨겨두었던 허기진 마음까지 가득 채웠다.
<11월 06일, 목>
31. 붉게 물든 희생
여름을 다 바친 당신의 청춘
가을빛 곱게 물들고
남은 열정을 끝내 태우듯이 붉어진다
햇살에 비쳐 반짝이는 당신
발그레한 미소
여전히 눈부시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 떨림
당신의 숨결
가녀리고 수줍다
떨어지기 전 더욱 붉어지는 잎사귀
당신의 온기
떠날까 마음이 저린다
단풍잎의 아름다움을 이제야 알겠다
그 붉은빛이
자신을 내어준 희생이었다는 것을
공원에서 붉게 물드는
단풍길을 걸으며
당신을 생각한다
붉은빛이 오래 머물고
가을이 오래 머무르기를
겨울이 조금 더 멀어지기를
<11월 08일, 토>
부모님을 모시고 바람 쐬러 대부도로 가기로 했다. 어디 가자고만 하면 “막걸리 먹었던 그 집?”이라고 하실 만큼, 부친에게 그 막걸리의 인상이 깊게 남아 있다. 몸이 불편한 어른들을 모시고 먼 곳을 가는 것도 쉽지 않아서, 결국 또 익숙한 대부도로 정했다.
그런데 본가에 도착하니, 모친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고 부친만 옷을 모두 갖춰 입고 계셨다. 왜 준비를 안 하고 계시냐고 묻자, 또 한바탕 하셨다고 한다. 부친이 안 볼 때 모친이 나를 향해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 나지 않게 “으이그…” 하고 입 모양만 움직이셨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두 분 다 대부도를 가는 것에 대한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아침을 먹고 나서 바닷바람 쐬러 가자는 말에 싫다고 성질을 내셨다고 한다. 대충 짐작이 갔다. 센터 가기 싫어 구시렁대던 모습처럼, 이것저것 이유를 대며 버티셨던 모양이다. 모친은 “막내 올 때가 됐으니 준비해야지”라며 서두르셨을 테고, 그러다 삐치신 듯했다.
결국 부친은 “바닷바람이 몸에 나쁘대. 난 안 가.” 하시며 경량 패딩을 입은 채 소파에 누워버리셨다.
“그래서 진짜 안 가신다고요?”
“안 가.”
단호했다.
모친도 포기하신 듯 “그럼 너랑 나만 갔다 오자” 하셨다. 누님이 집에 계시니 점심은 챙길 수 있을 테고, 덩치 큰 손자도 있으니 별일은 나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게다가 오늘의 나들이는 모친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최근 많이 지쳐 보이셨고, 마음의 응어리가 보였다. 그래서 그냥 모친만 모시고 대부도로 향했다.
차 안에서 모친은 당연하다는 듯 부친 이야기부터 꺼냈다. 엊그제 주간보호센터에서 부친이 폭언이 잦아졌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치매 증상일 수 있으니 다음 진료 때 의사에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본가에 갈 때마다 부친의 짜증이 늘어난 걸 느꼈는데, 센터에서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아휴, 요즘 아주 속이 터진다. 말해도 화, 안 해도 화. 매일 아침마다 구시렁거리니 센터 보내는 것도 힘들다.”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모친은 쏟아냈다. 그동안 말 못 하고 쌓아두신 게 많았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감정 표현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무뚝뚝한 부친과 인내로 버티던 모친을 보며 자라서인지, 우리 형제도 감정을 터놓는 방식이 어색하다. 누나가 어린 시절 수다스러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으나, 내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기며 조용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어른들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나이를 먹고도 부모님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쉽지 않다. 모녀지간인 누나와 모친 사이에서도 속 깊은 대화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큰일만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그런 환경에서 모친의 응어리가 쌓이지 않을 리가 없다. 대외활동도 거의 없으신데, 그 마음속 화와 서운함을 어디에 풀 수 있을까.
“쌓아두지 마시고, 다 이야기하세요. 해결이 될지는 몰라도, 저랑 둘이 나눠요.”
막내아들이 듣는다고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지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아닌가. 말로라도 내뱉으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테니, 그냥 다 말하라고 했다. 그렇게 모친과 나는 근황 이야기를 나누고, 부친을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흉보기도 하며 마음을 나눴다. 100% 솔직해질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서로 조금씩 덜어냈다.
점심은 늘 가던 곳에서 칼국수와 파전을 먹었다. 부친이 함께 오셨다면 막걸리를 드려야 하나 고민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말없이 드시던 모친은 그래도 부친의 점심이 걱정이셨던 모양이다. 파전을 하나 포장하자고 하셨다. 구멍이 숭숭 뚫린 비닐봉지를 건네며 주인장이 말했다.
“이거 이렇게 열어두고 가셔야 바삭해요.”
식사 후에는 달빛전망대 1층 카페에서 라테를 마셨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앉아 라테를 마시며 모자간의 수다를 이어갔다. 가을 같은 붉은색 플리스를 입은 모친은 바다를 바라보며 라테를 홀짝이셨다. 우유를 덜 데웠는지 빨리 마시고 집으로 가라는 듯 커피는 어정쩡했다. 그래도 모친은 맛있다며 드셨다. 온화하지만 조금은 지친 미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친에게 작은 휴식이 되었기를 바랐다.
잠시 산책을 하던 중,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모친은 통화를 하면서 금세 얼굴이 환해지셨다. 누나 말로는, 부친 점심으로 국수를 드렸는데, 식사 후 부친이 5만 원을 내밀며 “엄마한테 점심 안 먹었다고 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모친은 한참 웃으셨다. 상황이 웃기기도 했지만, 점심을 제대로 드셨는지 걱정했던 마음이 풀린 탓도 있었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랗고 붉게 물든 가로수들이 지루하지 않게 시야를 채웠다. 차 안에는 파전 냄새가 은근하게 퍼져 있었고, 단풍보다 곱게 물든 모친은 창밖에 지나가는 가을을 조용히 눈에 담고 계셨다. 조금 전보다 확실히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어머니의 가을이 조금 더 길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