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 그리고 무알콜 맥주

by 케빈은마흔여덟

11월 30일 (일)

아버지와 이발


점심 식사 전, 아버지의 머리를 깎아드렸다. 등받이 없는 의자가 불안하여 화장실 벽면에 밀착하여 앉혀드렸다. 새로 산 바리깡은 충전이 되어 있지 않아 결국 선을 연결한 채 이발을 해야 했다. 머리카락이 떨어질까 봐 두른 보자기는 또 작아서 아무래도 옷에 많이 묻을 것 같았다. 처음이라 서툴렀지만, 시작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짧은 전선이 불편했지만 조심조심, 한 땀 한 땀 깎았다. 기술은 부족했지만, 결과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발 후에는 머리를 감겨드렸다. “샴푸 줘봐.” “방금 샴푸 해드렸어요. 또 하시게요?” 금세 잊으신 모양이다. 하지만 뭐 대수인가. 또 하면 되지.


머리카락이 묻은 옷을 모두 갈아입혀 드린 후, 깔끔해진 모습으로 함께 점심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는 나와 아버지 모두에게 칭찬을 건네려는 마음으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어휴, 머리 깎으니까 이렇게 깔끔하니 좋다. 네가 잘 깎았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내가?” 하고 되물으신다. 참나, 그새 또 잊으셨나 보다. 한 시간이 넘게 준비하고, 머리 깎고, 머리 감고, 옷까지 갈아입었던 모든 과정이 기억에서 통째로 사라졌다. 굳이 알아주길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자체를 잊으셨다는 것에 제법 섭섭함이 밀려왔다.



12월 2일 (화)

느려지고 반복되는 일상


가지 마라 가을아,

계절이 천천히 지나길 바라는 느린 발걸음


가지 마라 시간아,

하루가 거꾸로 가길 바라는 반복된 말들


아버지의 일상은 느려지고, 반복된다

반복된다.


12월 5일 (금)

익숙함, 그리고 무알콜 맥주 한 모금


'처음만 어렵지 익숙해지면 (거의)모든 것이 쉬워진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을 다닌 덕분에 이제 그 병원 시스템은 눈에 선하다. 처음에는 접수, 진료, 검사, 수납 과정이 너무도 복잡했지만, 이제는 휠체어를 빌리고, 접수, 진료, 수납, 약 받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끝냈다. 기다리는 시간만 없다면 감탄사가 나올 정도다.


더 이상 악화될 곳 없는 '바닥'이었을까. 다행히 아버지의 증상은 걱정과 달리 현상 유지라는 결과가 나왔다. 내과, 내분비과, 신경외과 모두 전과 비슷한 처방을 받고 진료가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신경외과 진료실을 나오기 직전, 이전부터 궁금했지만 매번 잊었던 질문이 떠올라 의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무알콜 맥주는 조금 드려도 괜찮을까요?"


젊은 시절 말술을 드셨던 아버지는 뇌경색 직전까지도 술을 드셨을 만큼 애주가였다. 뇌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금주 생활을 이어가고 계셨다. 그런데 하루는 대부도로 나들이 가서 막걸리가 무료인 칼국숫집에 들렀었다. 건강을 생각해야 했지만, 술 드시던 웃는 얼굴이 생각나 종이컵에 한 모금을 따라드렸었다. 치매 증상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날의 기억만은 잊지 못하시고 '막걸리 먹은 칼국숫집'을 자꾸 말씀하셨다. 건강이 안 좋을까 걱정했던 생각과 달리 건강은 이상 없고 막걸리 생각만 키운 듯했다. 예상치 못한 흐름에 어찌해야 할지 고심이 컸다. 그래서 '0'알코올 맥주가 대안이 되면 좋겠다 싶었다.

“제로라면 조금 드셔도 됩니다.”


집에서 점심을 먹기 전, 무알콜 맥주 캔을 하나 사서 아버지 컵에 두 모금 정도 부어드렸다. 무알콜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고, 의사의 허락으로 오늘만 조금 드릴 수 있는 거라고 말씀드렸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나누어 드시는 아버지를 보니 마음이 뭉클했다. 건강하실 때 소주 한 잔 제대로 따라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또 후회처럼 밀려왔다. 그래도 무알콜 맥주로 가끔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어제 밤 급하게 내렸던 눈 때문에 서울에서 의왕으로 퇴근하던 차량이 5시간도 더 걸렸다고 한다. 다행히 기온이 올라갔고, 반나절 사이 도로에 내렸던 눈은 촉촉한 흔적만 남겼다. 엄격하던 규칙에 허용된 '제로' 덕분에 모처럼 부친의 웃는 모습을 보았다. 집에 가는 길, 차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흥얼거리다가,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에 내 마음도 눈 녹은 듯 촉촉해졌다.




12월 6일 (토)

노력과 죄책감 사이

'혹시 한의원 침놓는데 아는 데 있어?'

누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제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을 때, 아버지의 몸이 조금 이상했었다. 신경안정제를 끊고 심신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안방 침대에서 낙상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엉덩방아를 찧은 것인지, 아니면 허리를 부딪힌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섣부른 판단은 어렵지만, 걸을 때는 괜찮고 일어날 때만 아프다고 하셔서 우선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큰 문제는 아니길 바랐는데, 자꾸 아프다고 하시니 결국 누님이 안 되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질문이었지만, 아버지를 모시고 한의원에 다녀오라는 말임을 알고 있다. 누님의 성정상 악의는 없겠지만, 연락을 받은 나는 고약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제 병원에 다녀왔는데 오늘도 한의원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카카오톡 내용으로 보아, 누님은 아버지보다도 어머니의 건강이 더 걱정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허리 아프다며 밤에 화장실 갈 때마다 어머니를 깨워 일으켜달라고 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잠을 못 주무셨다고 설명했다. 매일 이러면 큰일 날까 봐 뭐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나에게 SOS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니던 한의원은 주차할 곳이 없어 모시고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침은 한 번 맞고 좋아질 리도 없고, 며칠을 계속 모시고 가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진짜 허리에 문제가 있다면 사진 촬영으로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뼈에 문제가 생겼다면 침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일 상태를 보고 계속 아프다고 하시면 정형외과를 모시고 가서 사진부터 찍겠다고 답했다.


답을 하고 나니 죄책감이 들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모시고 가지 않으려고 했던 마음이었을까. 요새 아버지와 관련된 생각과 행동에 나는 분명 노력하고 있다. 내가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만큼 어머니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에 더 적극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인가' 하는 물음에는 늘 마음 한편이 불편해진다. 그런데 내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죄책감이 드는 내가 맞는 건가 잘 모르겠다. 그저 순리대로 이 시간이 잘 지나가면 좋겠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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