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역설

by 케빈은마흔여덟


1월 27일

슬픈 역설

부친은 충청도 사람치고는 성격이 무척 급하고 부지런했다. 그의 새벽 출근은 한 번도 거른 적 없는 일상이었고, 어떤 약속이든 예정 시간보다 30분 전에는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있어야 직성이 풀리셨다. 명절이라도 되어 시골에 갈 때면 새벽 2시부터 채비를 마치는 통에 가족들도 할 수 없이 이른 시간부터 눈을 비벼야 했다. 일찌감치 상경해 거친 서울 땅에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부친의 행동 양식을 '서울 사람'으로 개조시킨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몸의 속도는 서울을 따라잡았을지언정, 입술 끝에 맺힌 화법은 여전히 무뚝뚝한 충청도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 집안 어른들은 대대로 그 특유의 무뚝뚝함과 답답함이 배어 있었다. 속이 타들어 가다 못해 재가 될 때쯤에야 툭, 던지는 한마디가 우리 집안 대화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서울 생활 수십 년에도 부친은 그 고향의 정서를 끝내 벗어던지지 못했다. 덕분에 우리 집에서 '살가운 대화'란 TV 드라마 속에서나 나오는 판타지 대사에 불과했다. 게다가 전형적인 가부장적 공기가 지배하던 집안이라, 대화의 문법에는 '부탁'이 없고 '지시'만 존재했다. 그런 부친이 병상에 눕고 나서야 한 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바로 그 견고하던 권위가 힘을 잃었다는 점이다.

“머리 좀 감겨줘.” “고맙다.”


평생 지시만 하던 입술에서 부탁이 나오고, 인색하던 고맙다는 표현이 잦아졌다. 병마가 앗아간 기력 대신, 화법만큼은 비로소 다정한 서울 사람이 된 셈이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부친이 건강할 때 그 불같던 성격과 대쪽 같던 말투가 그렇게도 싫었는데, 이젠 그 호통을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어떤 무뚝뚝함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게 충청도식이든 아니든, 성격이 급하든 말든, 화법이 차갑든 따뜻하든 상관없다. 그저 부친이 다시 건강해져서, 그 무심하고 투박한 옛날 목소리로 나를 다시 호령해 주길 바랄 뿐이다.



1월 29일

의미 없는 이야기를 후련하게 이해했다.

도서관 개관을 기다리는 이른 아침, 노트북을 펴기엔 애매한 시간이라 AI에게 로또 번호나 추천해 달라며 실없는 말을 건넸다. AI가 내놓은 번호 세 세트를 보다가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내가 원래 쓰던 번호가 당첨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돌아온 답변이 뜻밖이다. 당첨 확률은 어떤 번호나 같지만, 만약 내가 고른 번호가 당첨된다면 수령액은 생각보다 적을 거라는 예측이었다. 나름대로 남들이 고르지 않을 법한 번호들만 골라 만든 나만의 조합이었는데 말이다.


나의 이론은 명확했다. 수학적으로 1부터 6까지 연속된 번호든, 무작위로 섞인 번호든 당첨 확률은 동일한 814만 분의 1이다. 과거에 많이 나왔던 번호라고 해서 이번에 또 나올 확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현실 세계에서 제로에 수렴하는 이 희박한 확률을 논하는 건 무의미하기에, 나는 그저 나만의 의미를 담은 고정 번호를 고집해 왔다.


특히 나는 연속된 번호 세 개가 포함된 조합은 남들이 꺼릴 것이라 믿었다. "설마 41, 42, 43가 연달아 나오겠어?"라는 대중의 심리를 역이용하면, 당첨 시 파이를 나눠 가질 경쟁자가 줄어들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AI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역발상조차 보편적인 인간의 습성이라, "남들이 안 할 것 같은 연속 번호"를 고르는 사람이 의외로 너무 많다는 것이다. '무서운 녀석'. 결국, 남들이 연상하기 쉬운 번호나 그럴싸한 역발상의 함정에 빠진 번호들은 당첨자가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로또 번호를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교한 알고리즘도 무작위의 영역을 침범할 순 없다. 다만, '사람이 선호하는 번호'와 '사람이 피하려 하는 번호'는 분명히 존재한다. 매회 수십 명의 당첨자가 쏟아지는 이유는 우리가 각자 특별하다고 믿으며 선택한 그 조합들이 실은 매우 비슷한 인간적 연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터다. 역시 당첨금을 독식하려면 인간의 보편적인 상상력을 완전히 벗어난 '의미 없는 번호'를 찾아야 하는 모양이다. 뭐, 혹시 모를 그날을 위해 일단 다음 복권부터는 그 애지중지하던 연속 번호들부터 바꿔봐야겠다.



1월 30일

서늘한 현실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골절된 척추뼈는 큰 변화는 없습니다. 붙으려면 두세 달 걸리니까. 약 드시고 다음 달에 다시 한번 보죠”

허리통증이 있는 한 이제 진료과목은 4개로 확정된 것 같다. 부친은 이런 상황을 체감하시긴 하는 걸까.


병원이라는 곳이 병을 치료하는 곳이긴 하지만, 다닐수록 진료과목이 늘어나니 아이러니다. 물론 허리는 낙상으로 인한 특수한 경우지만, 신경외과에서 내분비과로, 내분비과에서 신장내과로, 이젠 정형외과까지. 모친의 경우도 건강검진받은 뒤 정기 진료과목이 3개가 됐다. 부모님 병원을 모시고 다니면 다닐수록 분명해진 건, 노년에는 돈이 꼭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2월 01일

아침부터 집안에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모양이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집안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방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소리들을 모아보니 대략 이런 사건이었다. 아이는 일찍 일어나 제한 시간을 어기고 몰래 스마트폰을 사용했고, 불시에 거실로 나온 엄마에게 그 현장을 딱 걸리고 만 것이다. 재미를 쫓다 규칙을 저버린 아이는 어쩔 줄 몰라했고, '믿어주면 따라올 것'이라 굳게 믿었던 아내는 배신감에 깊은 상처를 입은 듯했다.


“통제가 안 될 것 같으면 차라리 풀어버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내가 조언한 지 불과 이틀 만에 터진 사달이다. 아이를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은 내 마음과 같지 않다. 나는 규제할 때는 단호하되, 통제가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자유를 주자는 주의지만, 아내는 최대한 믿음으로 아이를 이끌고 싶어 한다. 육아에 있어 정답은 없기에 최대한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며 보조를 맞추려 노력하지만, 이렇게 믿음이 어긋나 버리는 날엔 아이도 부모도 깊은 생채기를 입게 된다.

어긋난 신뢰와 뒤섞인 배신감. 그 무거운 공기 때문에 한동안 우리 집은 또다시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위태로울 것 같다.


살면 살 수록 삶이란 내가 정해놓은 규격과 수식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는 것 같다.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오류에 당황하고, 늘어가는 삶의 무게에 위축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 무질서한 틈을 메우는 건 완벽한 통제가 아니라 약함을 인정하는 비움의 미학이 아닌가 싶다. 앙상한 가지가 잎을 버려 겨울을 나듯, 나 또한 '완벽해야 한다'는 가장의 오만을 버리고 나니 비로소 가족 전체의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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