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잘못돼서 다시 발행 했습니다.
2월 14일 (토)
매일 쉬는 처지임에도 연휴는 여전히 반갑다. 비루한 백수의 삶이라도 빨간 날만큼은 달콤한 휴식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조금은 가난한 마음을 안고 구정 연휴를 기분 좋게 시작했다. 보통 연휴의 첫날이 가장 기분 좋은 법이니까.
2월 15일 (일)
“내일 할 일 없고, 너무 심심하면 와서 전이나 부쳐.”
본가에서 점심을 먹고 나올 때 누나가 던진 말에는 뼈가 있었다. 사실 누나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돌아온 친정이긴 하지만, 형편이 넉넉해서 들어온 게 아니니 늘 부모님 눈치를 살피며 살 수밖에 없을 터다.
원래라면 시댁에서 했어야 할 명절 노동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늙은 엄마의 고된 일손을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노고가 남았다. 며느리들이 와서 도와야 한다는 마음이 없진 않겠지만, 엄마의 강한 성정을 잘 알기에 독한 시누이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누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고작 "심심하면 오라"는 한마디였을 테다.
나라도 가서 일손을 보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나 혼자 가면 아내의 마음이 불편할 것이고, 같이 가자니 아내에게 명절 노동을 시키는 건 내가 더 싫었다. 그렇다고 홀로 고생하는 노모와 누나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명절은 역시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다. 명절 뒤에 이혼율이 높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누님 미안하네, 내가 나중에 다 보상할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미안함이 비겁한 다짐이 되어 마음속을 맴돌았다.
2월 16일 (월)
명절은 왜 늘 긴장감을 동반할까. 현실에선 TV 속 막장극 같은 큰 싸움은 없지만,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연휴 내내 마음을 짓누른다. 부모님께 더 잘하고 싶은 내 마음은 며느리인 아내에겐 '더 많은 노동과 시간'을 의미하기에,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부족한 효도의 속도를 늦춘다.
올해는 유독 더 그랬다. 늘 사가던 홍삼 선물을 두고 망설였고, 조카들 세뱃돈 액수를 두고 머릿속 계산기를 돌렸다. 돈벌이가 괜찮을 땐 내 뜻대로 했었건만, 이제는 아내의 눈치에 내 마음을 맞춘다. 지갑의 두께가 곧 발언권의 크기가 아닌가. 마이너스통장만큼 깊은 불편함을 남기느니 침묵이 답이다.
2월 17일 (화)
결국 이번 설 세뱃돈은 엉망진창이 됐다. 부모님께는 받기만 하고 드린 게 없었고, 딸아이가 받은 돈보다 턱없이 적은 금액을 조카들에게 쥐여주었다. 암묵적인 형평성을 깨버린 채 못난 아들이자 못난 삼촌이 되어버린 기분.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내 처지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나는 그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 서둘러 본가를 벗어났다.
마음이 가난해지니 보지 않아도 될 것들까지 눈에 띈다. 처가로 향하는 아내의 짐 가방 사이로 홍삼 세트 하나가 보였다. 분명 며칠 전 '이번엔 사지 말자'라고 합의한 줄 알았는데, 그건 본가용 선물만을 뜻했나 보다. 섭섭함이 올라왔다. 고작 몇만 원짜리 선물에 이런 비루한 생각까지 하다니, 역시 마음이 가난하면 영혼도 좁아지는 모양이다.
양쪽 집 냉장고를 털어 얻어온 반찬 통들을 정리하며 큰 숙제를 끝낸 듯 안도했다. 뒷베란다에서 꺼낸 찬 두유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 순간, 며칠 전부터 욱신거리던 잇몸에서부터 날카로운 고통이 전해왔다. 찬물도, 뜨거운 물도 허락하지 않는 이 치통. 누구 탓을 하랴, 다 내 잘못인 것을. 고대하던 명절이 언제부터 이렇게 아픈 연휴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2월 18일(수)
명절 내내 양가에서 얻어먹은 기름진 음식 탓인지 층층 쌓인 지방처럼 몸이 찌푸등 무거웠다. 혼란했던 마음도 달랠 겸 러닝을 나가기로 했다. 휴대폰 화면에 뜬 기온은 영상 5도. 달리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씨라 생각하며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하지만 문밖을 나서자마자 매서운 칼바람이 뺨을 때렸다. 영상이라는 숫자는 그저 숫자일 뿐이었다. 그래도 뛰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무작정 안양천으로 향했다. 찬 바람은 생각보다 시렸고 장갑조차 챙기지 못한 손등은 어느새 벌겋게 질려버렸다. 결국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뒷짐을 지었다 풀었다 하며 평소 다니던 코스를 다 못 채우고 서둘러 러닝을 마쳤다.
삶은 언제나 예측 불허다. 영상 5도라는 숫자에 따뜻한 봄날을 기대했다가 매서운 바람에 호되게 당한 오늘처럼, 인생이라는 날씨 역시 우리가 미리 확인한 수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지갑이 가난해 마음까지 비루해졌던 이번 구정 연휴도, 갑작스레 찾아온 신경질적인 치통도 사실은 예측하지 못한 삶의 변수들이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예측할 수 없기에 앞으로의 삶에 다시 훈풍이 불어올 것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찬 바람이 나를 움츠러들게 했지만, 내일의 바람은 또 어떤 온도로 나를 찾아올지 모를 일이다. 그저 나는 나의 페이스대로 다음 챕터를 써 내려갈 뿐이다. 삶이라는 지도에 '예상치 못한 국도'가 나타나더라도, 그 길 끝에는 생각지도 못한 근사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어본다.
2월 19일(수)
아직 겨울 얼굴을 한 굽이진 공원길
여태 언 땅인 줄 알고 걸었는데
발밑에 멈춘 간질거리는 시선
마른 흙 사이로 녹색 기운이 번진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떨림으로
잔디는 이미 봄의 안부를 묻고 있었나 보다
세상은 여전히 시린 바람 내뿜는데
땅 밑은 소리 없이 꿈틀대고 있었다
내 마음은 아직 겨울 한복판에 서서
어깨를 웅크린 채 봄을 기다리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의 계절도
찬 슬픔을 뚫고 싹을 틔우고 있을까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처럼
마른풀 아래 숨겨둔 연둣빛 다짐처럼
보이지 않아도 이미 오고 있는 것들
내일의 나를 깨우려 발바닥을 간지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