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새로운 세상이 올까?

- 기다렸던 봄

by 케빈은마흔여덟

술을 마시고, 폭식에도 끄떡없던 배가 이제는 힘을 줘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소화력이 떨어진 탓도 있겠지만, 퇴직 후 불규칙한 식습관도 한몫했으리라. "나온 배는 쉬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라, 걸을 수 있는 시간을 조금 늘려 보기로 했다.


도서관에 차를 대고 주차장 옆 공원을 걸었다. 아직 싸늘한 꽃샘바람이 헐렁한 스카프 사이를 파고들어 노출된 목을 서늘하게 했다. 방심했던 외투 단추를 채우고, 몸을 움츠린 채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파트 사이로 들어오는 따뜻한 아침 햇볕이 공원 곳곳에 온기를 피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러닝을 하는 사람, 성급하게 핀 벚꽃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 사이로 노란 개나리가 눈에 들어왔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꽃들이 산책로를 따라 줄지어 피어 있었다. 그 사이 군데군데 아직 피지 못한 조팝나무의 몽우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때를 기다리고 있다. 겨울을 견딘 봄은 시작이고, 희망이었다.


최근 부친의 치매 증상이 눈에 띄게 심해졌다. 먹고, 자고, 싸는 기본적인 운동 능력은 느려졌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인지능력 저하는 다르다. 돌아서면 까먹고 같은 말을 반복하니 옆에 있는 사람의 인내가 필요하다. 가족이라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라서 모친의 건강도 걱정이다. 모친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방법을 찾아야 했다.


부모를 시설에 맡기는 것이 맞는 선택인지 아직 확신이 없다. 효도를 강조하는 주입식 교육 때문인지 마음 한편에 불효자라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부친이 집에만 계시면서 더 악화된 것은 분명했다. 이제 부친에게는 활동이 필요하고, 모친에게는 또 휴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장기요양등급을 받아 낮 시간에만 주간보호센터에 모시는 것을 계획 중이다.


“그런 노인 시설에 가면 막 때린다더라.”


어디서 들은 이야기일까, 과거 방송에서 본 장면이 머릿속에 박힌 걸까. 알 수 없지만, 잘못된 정보가 치매 노인의 기억에 자리 잡았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온 담당자와 면담한 이후로는 무섭다며 잠을 설친다고 했다.


“데려가서 떼어놓고 올 거야?”


모친께 묻는 부친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잘하는 선택일까? 싫다는 부친을 설득할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는다.


싫어하는 활동을 억지로 시키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뇌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의사의 말에, 하기 싫은 활동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관심은 의도치 않게 방관이 되어 부친의 치매 증상에는 좋지 못한 영향을 준 것 같다. 결국 모친에게도 희생을 강요한 꼴이 되고 말았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늘 미안한 마음이다.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었을 부모이기에 보답하고 싶지만, 현실은 늘 반대로 흘러갔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지만 변변치 못했고, 돈 많이 벌어 호강시켜 드리고 싶었지만 벌이가 시원찮았다. 자주 찾아뵙겠다고 했지만 늘 뒷전이었고, 연락이라도 자주 드리고 싶었지만 잊어버렸다. 내가 아이를 돌보는 사이, 부모님은 어느새 노인이 되어버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의사를 핑계 삼은 나의 무관심이 문제였던 것 같다. 부친의 치매는 어쩌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이고,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부친의 아우성 일지도 모르겠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라면 마음속에 답이 있지 않을까.


겨울을 이겨내고 피워낸 꽃처럼 인내 뒤에 올 희망을 기대해 본다. 주간보호센터를 가기 싫다고 하시는 부친을 억지로 보내는 것이 맞는지 아직 확신은 없다. 하지만 방관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다. 더 관심을 갖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하다 보면 희망의 봄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개나리는 긴 겨울을 이겨낸 인내의 상징이자, 새로운 희망의 출발점이다. 오늘 아침 내 눈에 들어온 개나리의 꽃말에 마음을 기대 본다. 인내와 희망.


저녁때 집안 분위기가 냉랭하다. 아이의 학교 수업은 많아지고 학습지는 어려워지니 공부하기 싫다며 자주 시위를 펼친다. 그러는 사이 와이프의 한기가 느껴진다.


부모는 공부하길 바라지만, 아이는 놀고 싶어 한다. 부모는 아이의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이지만, 아이는 지금 못 노는 게 걱정이다. 엄마와의 다툼은 잦아졌고, 아이가 우는 날도 종종 있다. 하지만 갱년기와 사춘기의 호르몬 싸움에 힘없는 중년 남자가 함부로 끼어드는 건 위험한 일이다. 언젠가는 아이도 스스로 책을 펴게 될 것이다.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기다리면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혼란한 정국 속에서, 풀리지 않는 일상과 기대 없는 나날이 이어진 지도 벌써 수개월째다. 강도 높은 스트레스는 쉽게 피로를 불러오고, 밤잠을 설치게 하며 또 다른 하루를 고단하게 만든다. 마음속 염증은 곪았다가 터지기를 수차례 반복하다가 딱지가 앉았다. 인내한 만큼 새살이 돋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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