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멘 Mar 01. 2022

걷기

개 같은 서른 하나

 7월 한 달 동안 무슨 바람이 불었나 밤마다 동네 식물원을 걸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5.36km를 54분에 완주할 수 있다. 1990년대 엄정화 언니와 함께 걷다가 2000년대 JYP를 따라 부르고, 2010년대 브아걸과 함께 뛰었다.      


 저녁 8시 식물원은 걷는 사람들과 그들의 반려견 천국이었지만, 드문드문 설치된 가로등 덕에 적당한 어둠이 깔렸다. 화 나는 날 엉덩이를 이리저리 흔들며 파워워킹을 해도, 마음이 울적한 날 땀인 척 슬쩍 눈물을 훔쳐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적당한 어둠 속에 신나게 걷고 나면 ‘오늘도 생산적인 일을 했구나’란 뿌듯함만이 남았다.      


 걷기는 활동적인 행동을 하자는 다짐에서 시작됐다. 퇴근하고 저녁 먹고 누워 핸드폰을 보다 보면 금방 11시였다. 솔직히 말하면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밤마다 달리는 동생과 그런 아들의 의지를 칭찬하며 침대에 누워있는 날 향해 ‘나가서 좀 걸으라’는 엄마의 등쌀에 밀려 시작했다.


 하지만 매일 저녁 운동복을 챙겨입고 나가 걷는 건 내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팔 할은 나의 의지였다. 필라테스 가는 수요일, 토요일을 제외하고 월화 목금 꾸준히 걸었다. 숨을 몰아쉬는 버릇 때문에 턱 끝까지 숨이 막히기도 했지만, 오히려 숨이 트였다.     

 

 극한으로 나를 내몰고 싶은 날은 노래 한 곡이 재생되는 3분 동안 뛰었다. 그 뒤엔 몸속에서 차오른 뜨거운 숨과 여름밤의 두터운 공기가 마스크를 경계 삼아 마찰을 일으켰는데 그 숨 막힘이 변태같이 좋았다.    

 

 하루하루 운동 기록이 모였을 때 문득 걷기에 의미를 부여해야겠다 생각했다. 누가 알아봐 주지 않아도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나의 루틴으로 잡아가는 일. 타인의 인정받기 좋아하는 내가 주체를 타인이 아닌 나로 돌리는 연습을 하는 거라고 정의했다.   

   

 기사 쓸 때도 내 것을 그대로 베껴 자신의 것인 양 말하는 양아치 같은 사람들을 보며, 온종일 정신없이 기사를 썼는데 추가 발제 없냐는 지시에 허탈해지며, 나와는 달리 365일 행복해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초라해지며, 스스로 인정하는 굳센 자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8월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오자 걷기는 끝났다. 하지만 한 달 동안 퇴근 후 꼬박 한 시간을 걸은 건 기록할만한 일이었다. 이런 크고 작은 경험이 어떤 형태로든 내 몸과 마음에 쌓이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공포를 버텨내는 힘이 달라졌다. 그라운드 위에서나 그라운드 밖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물리적 충돌을 대면하는 수밖에 없다면 여차하면 나도 육탄 방어할 거야, 때릴 수 있다면 나도 같이 때릴 거야, 라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공포가 조금 줄어들었다…그라운드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맞는’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고통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고, 그렇게 고통이 구체성을 띠고 다가오니 그게 또 두려움을 한결 줄였다


김혼비 『다정소감』 (안온북스, 2021)     
작가의 이전글 떼 내고 싶은 ‘노력형’ 딱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