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까지 랜덤으로 뽑게 될 줄은 몰랐다.
미술관 봉사가 끝났다. 몇 달 정도 진행된 봉사였지만 주마다 두 번, 한 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오가서 그런지 더 길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일주일의 많은 시간을 차지했던 봉사가 끝났다는 건 오랜 기간 같은 전시회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하나의 루틴이 되어버린 시간이 비워진다는 것이다. 심심할 때면 맡고 있는 초상사진 구역의 인물들 이름을 모두 외우고, 같은 봉사자나 관람객과 짧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전시실이 한산해지면 챙겨 온 책을 읽던 시간들이 내게 돌아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아쉬운 점이 많은 일이라도 지나고 보니 다 좋았던 시간처럼 느껴진다. 이미 지나간 추억이 되어 흐릿해져서일 것이다.
마지막을 정리하고 나오며 아트샵에 들렀다. 내 취향의 전시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오래 봉사활동을 했으니 남기는 것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서류상 봉사시간이 남겠지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갖고 싶었다. 전시회의 기념품점은 기념품점이라고 부르기에는 꽤 작은, 탁자 몇 개가 놓인 작은 구역이었지만 충분했다. 전시회가 끝나가서인지 세일을 하는 물품들도 더러 있었다. 도록, 노트, 마스킹 테이프 등 다양한 기념품 중 눈길은 끈 것은 당연하게도 엽서였지만 그중에도 '엽서 5장 랜덤 팩'이 눈에 띄었다.
<엽서 5장 랜덤 팩>
한 장 한 장 멋진데 고르기 힘드시다고요?
랜덤으로 5장을 담았습니다.
2,500
예전에 게임을 즐겨해서인지 이 '랜덤'이라는 단어는 이상하게 끌렸다. 낮은 확률을 믿으며 얼마나 많은 돈을 게임 가챠(뽑기)에 쏟아부었던가. 그때를 생각하면 절로 고개를 젓게 된다. 그런 실수를 했기에 남는 것 없는 것에 필요 이상의 돈을 쏟아부어서는 안 된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이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소비 습관을 바로잡았지만 이미 써버린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이천오백 원은 적은 돈이었지만 랜덤은 랜덤이다. 엽서 한 장에 천 원이니 원하는 엽서 한두 장만 골라사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하지만 왠지 랜덤 팩에서 좋은 게 나올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긴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사람은 자신의 운을 시험해보길 바라는 법이다. 게다가 이런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해봤자 이천오백 원의 손해와 약간의 실망 정도로 끝나는 일이다.
오래 머뭇이지 않고 마지막 남은 랜덤 엽서 팩을 구매한 뒤 가방에 넣고 바쁘게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역까지 가는 동안 집까지 가는 지하철을 놓치기 싫다는 마음에 뭔가를 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그 존재를 다시 떠올린 건 꽉 찬 지하철이 조금 한산해졌을 때였다. 한 시간 넘게 타는 지하철 안에서는 항상 심심했다. 잠을 자도 끝나지 않는 이동시간에 무료함을 덜어보려고 가방을 뒤적이다 발견한 엽서는 심심함을 달래기 딱 좋은 도구였다. 무엇이 나올까 짐작해보며 엽서 포장을 열었다.
맨 앞장은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종이로 된 포장지라 꾹 누르면 맨 겉면의 엽서가 비쳐 보였기 때문이다. 제목은 모르지만 무난한 사진이었다. 신문을 읽는 사람의 머리를 묶인 커튼이 가리고 있는 사진인데 특이했지만 이 사진을 전시실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자주 머물렀던 구역이 아닌 이상 모든 작품을 기억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다. 내가 가볍게 훑고 넘어갔던 것인가 되짚어보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두 번째는 트루먼 카포티의 초상사진이었다. 그는 <인 콜드 블러드>와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작가라는데 비록 책을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후자의 경우 영화로도 유명해서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것 같다. 트루먼 카포티의 초상사진은 내가 주로 맡았던 구역에 있는 작품으로 사르트르의 초상사진과 더불어 인기가 많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카포티가 앉은 벤치를 둘러싼 식물들은 확실히 감각적이다.
그밖에는 기하학적 구도를 잡은 풍경 사진 두장과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는 남자 둘의 사진이 담겨있었다. 다섯 장 중 소위 인기가 좋은, 많이 사가는 엽서는 한 장 정도였다. 다섯 장 중 한 장이니 만족도는 20% 정도라 할 수 있겠다. 이 정도면 게임과 비교해 봤을 때 높은 확률이다. '로우리스크, 하이리턴'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원하는 엽서를 많이 얻지 못해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재미있는 소비라는 생각으로 남았다. 그리고 하나의 인기 엽서와 인기가 덜한 엽서 네 장의 조합을 팩으로 구성한 것에 대해 경영학도로서 박수를 보낸다. 포장지 하나로 매출을 올리는 멋진 방법이었다. 전공이라는 게 괜한 건 아닌지 가끔 예술에서 경영을 우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사람들은 배운 대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닌가 보다.
아무튼 마케팅면에서도 그렇고, 나처럼 랜덤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을 위한 맞춤 상품에 만족한다.
봉사의 마지막을 가챠로 마무리짓다니 흥미로울 뿐이다.
* 글에 첨부된 사진은 제가 산 엽서를 직접 찍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