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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pyo Oct 11. 2024

노벨문학상과 로보택시

책을 읽지 않는 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이 탄생했다.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동안 몸이 너무 아팠고, 다 읽고 난 뒤에는 너무 힘들어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 제주 4.3 사건을 다룬 책을 냈다고 했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아니, 안 했던 것 같다. 내 삶은 문학보다 다큐에 가까워서, 피부에 닿은 문제를 털어내느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문장을 볼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곳에 기웃거리며 나를 증명하는 길에 들어서 있었는데,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한 뼘만큼 세계관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어쨌든 노벨문학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번역의 한계를 운운하며 수상 불발에 변명을 달던 비루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대중음악이 빌보드 차트 1위를 했다는 소식만큼 너무나 꿈 같은 일이다. 그녀의 소설을 처음으로 번역한 영국 엘리트인 스미스 양은 혼자서 한국어를 공부했고, 출판부터 홍보까지 사방으로 뛰어다녔다고 한다. 그녀가 한국어를 공부한 것도 성장가능성이 무한하다는 판단에 따름인데, 10여년 뒤에 그녀가 번역한 작품의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 것은 그야말로 탁월한 안목의 결과가 아닐까. 이 꿈 같은 현실이 다가온 이 날, 나는 테슬라의 로보택시 발표회를 봤다.


핸들, 브레이크, 가속 페달 같은 주행 장치가 전혀 없는 자동차를 타고 등장한 일론 머스크. 그는 자신이 바라는 세상은 주차로 인해 빼앗긴 대지를 되찾고 석유 연료로 파괴된 환경을 되돌리는 것이라 했다. 그 해결책이 자율주행 로봇이었다. 그리고 노동의 해방을 위해 인간처럼 춤추는 로봇을 보여주었다. 그는 말 그대로 미래를 가져와 눈앞에 펼쳤다.


“문송합니다”라는 표현이 익숙해질 만큼 우리나라 이공계는 차고 넘치는 시대가 되었는데, 우리는 머스크 같은 창업자가 없다. 사실 그 인재들은 이제 의대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 보신주의가 주류가 되어버린 지금은 우리에게 어쩌면 노벨문학상도 로보택시도 기대할 수 없다는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기반을 누가 만들었나. 40대인 내가, 그리고 그 윗세대가 만든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를 주구장창 나열하는 것은 덧없다. 더불어 논리를 갖추고 데이터를 가져온 이성적인 문장도 덧없다. 그저, 나와 내 주변인들은 알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지는 무엇을 보고 사는지에 달렸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보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


흙 속의 진주에 익숙해진 한국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품기에 딱 좋은 환경이지 않은가. 주말 동안 고민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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