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C레벨 스카웃제의 포기하고 창업한 경험담
"평생을 알만 낳다 나중에 털뽑혀서 먹히고 그렇게 살다 죽고 싶어요?“
"어떻게해요 그게 우리 팔자인데“
"그게 문제예요. 양계장 울타리가 여러분 머릿속에 있다는 것“
_영화 <치킨런> 중에서
요새는 창업의 턱도 많이 낮아지고 정부의 지원도 다양해져 창업에 대한 고민과 토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온라인상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12-15년 차를 넘어선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이 이직과 창업 사이의 결정이다. 40대로 들어서는 이 시기 실무 단계에서 업무 능력이 최고조에 이를 때다. 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다. 그 다음 단계로는 조직 내에서 승부를 걸고 팀장급 이상의 책임자로 승진하느냐 선택을 해야 하는 때이다. 다시 말해 스페셜리스트에서 벗어나 많은 팀원들을 이끌어가는 관리자의 길을 가야 한다.
코로나19 이후로는 창업에 대한 고민이 더 가속화되었다. 우리는 롤로코스터 삶 속에서 갑자기 올스톱이 된 '잠시 멈춤' 속에서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라는 고민을 심각하게 해 볼 절호의 기회를 맞이 하게 되었다. 혼란 속에서 경기 약화로 일자리 전선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안정적인 일자리로의 재취업이 쉽지가 않다. 한창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40대의 고용 부진이 창업에 내몰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 일을 하지 않았지만 외국직장 생활 12년을 한 나 역시 '이직과 창업'사이의 고민을 했다. 경력 13년째 되던 해, 나는 '수석 디자이너'로서 이루고자 했던 경력과 경험을 가졌다. 내 팀에는 13명의 직속 디자이너들이 있었고, 직속은 아니었지만 다른 3개 디자인 팀까지 총 25명 디자이너들을 인솔해야하는 '리미티드 에디션', '스페셜 콜렉션'을 매년 3개 정도 진행을 했다. 영디자이너,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도 꾸준히 이루어졌다. 13년째 한 분야에서 디자이너로써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안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경험과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이고 이쯤되면 변수를 두고 하는 여유까지 생긴다.
스페셜리스트 레벨이 되면 척보면 척보이는, 간단한 스케치, 컨셉, 사용할 질감, 색상, 텍스쳐 등 기본 스펙들만 봐도 비주얼화가 가능하다. 그 비주얼화 된 이미지는 여러 디자인 팀에서 매년 쏟아져 나오는 몇 백개의 디자인들과 합쳐진다. 회사 추구하는 핵심 가치를 유지하며 컴퍼니 브랜딩 범주안에서 빈틈없이 부족한 부분과 넘치는 부분을 재단하고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첫 시작부터 끝까지 전략과 전술이 몇 십가지 방향으로 갈려 상황마다 적제적소의 일처리를 할 수 있는 깜량이 생긴다.
2015년 스페인에서 산지 10년이 된 해였다. 수석 디자이너로 있은지 3년이 다 되어가는 시기였고 디자이너로써 13년째다. 이 당시 나는 회사에서의 만족감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 이유는 스페인에서 내노라하는 회사들에서 많은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고, 그럴 때 마다 '내가 얼마나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이 길이 과연 앞으로 10년쯤 더 하고 싶은 일일까?' 라는 원초적인 고민으로 도돌이표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유명한 패션 회사들은 크게 보면 세 도시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전 세계 2,000개가 넘는 의류 브랜드 망고 (Mango), 비즈니스 캐주얼 마시모두띠(Massimo Dutti), 빅토리아시크릿의 스페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속옷 브랜드 오이쇼 (Oysho), 스페인 특유의 현란한 색채와 화려한 패턴으로 유명한 데시구알 (Desigual), 1920년 창립한 주얼리 및 악세서리 브랜드 투스(Touse) 등이 있는 바로셀로나 지역. 그리고 피혁 제품으로 널리 알려진 명품 브랜드 로에베 (Loewe), 스페인 최고 백화점 엘 코르테 잉글레스 (El Corte Ingles), 럭셔리 파인 주얼리 수아레스(Suarez)등이 위치한 마드리드 지역.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랜디 스파 브랜드 자라(Zara), 한국에서 20~30대 여성들이 좋아하는 빔바이롤라 (Bimba & Lola), 내가 일했던 스페인 럭셔리 브랜드 CH 카롤리나 헤레라 (CH Carolina Herrera)등이 위치한 스페인 북부다.
난 당시 스페인 북부에 살았고 스카웃 제의는 대기업이나 대대손손 전해오는 전통있는 브랜드들로 스페인 왕실과 유서 깊은 곳도 있었다. 이 기업들은 바로셀로나와 마드리드에 본사가 위치해 있었다. 스카웃 제의를 받은 자리는 CCO (Chief Creative Officer),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나 아트다이렉팅을 견비한 수석 디자인 책임자 자리였다. 보통 금요일이나 월요일에 인터뷰가 잡혀있고, 주말 동안 머무를 수 있는 비행기와 호텔을 제공받으며 회사 CEO와 사장님들과의 저녁식사, 보드멤버와의 식사나 차를 마시는 만남까지 이루어진다. 여러곳에서 최종 오퍼를 받았지만 결국 가지는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원초적인 질문이 자꾸 내 머릿속을 채웠고, 지금 직장이 너무나 익숙하고 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받은 스카웃 제의를 거절한 것에 대한 후회를 할 계기가 회사에서 생겼다. 회사내 새로운 CEO와 다이렉터가 5명이 영입이되면서 모든 시스템과 새로운 목표 설정, 베스트 셀러들을 반복되는 철저히 수익화를 위한 방향으로 갔다. 새로운 디자인 이나 컨셉 시도는 모두 배척되었다.
회사에서는 어떻게 내가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는 걸 알고 콘드라 오퍼를 해서 여러 가지 약속을 했다. 하지만 이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았고 회사에 남아있는 것에 대한 회의감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새로 들어온 CEO와 다이렉터들은 회사를 혁신하려는 파도 속에서 사장님께서 내게 약속했던 것들을 전부 백지화했다. '회사를 다니는 의미'가 사라졌다. 매일 전쟁을 치르러 회사를 가는 기분이었다. 결국은 1 년의 전쟁은 나를 폐허로 만드는 번아웃이 왔다. 나를 성장시키려 했던 목표도 도전도 사라지고, 더 이상 일에 대한 열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직하지 않은 걸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 미련함에 한번 나를 자책했고, 도전보다 편안함을 선택한 내가 너무나 미웠다. 도전적인 목표를 찾았음에도 편안함을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나 스스로가 변했다는 것이 싫었다. 남편과 상의를 한 후 회사를 떠나 쉬기로 했다. 그리곤 혼자 2주 동안 다른 유럽 나라들을 여행 다니기로 결정했다.
번아웃을 털어내고자 떠난 여행인데 우습게도 여행을 다니면서도 어디를 가나 유명한 브랜드 샵과 주얼리 샵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손에 연필과 종이가 쥐어져 있고 때론 영수증에, 냅킨에 디자인이 담겼다. 그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치웠다. 하지만 그 잡다한 종이들을 버리지 못하고 주섬주섬 주머니에 가방에 챙겨넣는 나를 보며 '일 때문에 번아웃이 왔어도 디자인은 결국 못 내려놓는구나'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이 디자인들은 우연히 다가온 창업의 기회에 불씨가 되었다.
난 처음부터 '창업을 하겠다' 하고 작정하고 계획을 한게 아니라 '미니 콜렉션'을 제작해서 프랑스 럭셔리 마켓으로 내 디자인을 넣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고 그렇게 단순하게 시작했다. 이 일이 싱가폴에 회사를 세우고 리테일 샵 5개로 키우는 사업이 될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20015년 11월에 아리움 콜렉션 (Arium Collection) 이라는 주얼리 브랜드가 탄생을 했다. 번아웃 여행동안 디자인한 주얼리, 핸드백, 잡화, 옷 디자인들에서 주얼리만 골라내어 6개월의 로고 및 팩키징 디자인을 직접 하고 프로덕션 제작, 컨텐츠 사진 및 비디오 제작, 브랜딩 전략까지 세운 준비 과정을 지나 태어났다. 9개의 주얼리 콜렉션 제작과 팩키징을 제작하는데 5000만원의 투자 비용이 들었다. 아리움 '주얼리' 대신 '콜렉션'이라는 이름을 준 것도 핸드백과 잡화를 나중에 넣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주얼리 리테일 사업을 싱가폴에 런칭한 첫 해 3억 8천의 수익을 얻었다. 광고를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고객층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 싱가폴 등 유명한 연예인이 먼저 손을 내밀고, 인스타그램의 매크로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들에게서 다른 비용 요구 없이 주얼리를 협찬받고 싶다며 요구하지 않은 광고를 해주겠다고 연락이 들어왔다. 리흐첸스타인 공주님께서 알리움 콜렉션의 주얼리를 착용하시고 공식석상에 참가하셨다. 프랑스 엑트리스 Julie Judd가 고객이 되면서 Canne Film Festival에 아리움 주얼리를 착용하고 가기도 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Crazy Rich Asian) 에서 Jacqueline 역할로 나왔던 싱가폴 엑트리스 Amy Cheng이 LA 무비 프레미어 ( LA movie premieres)에서 아리움 주얼리의 귀걸이를 착용하고 나왔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되었다.
L'Official, 영국 Vogue, 싱가폴 Harper's Bazar, New York Times lifestyle T magazine등 유명 패션 메거진에도 소개가 되었다. 이건 1년 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런칭한 2개월 만에 Singapore Fashion Awards에서 Emerging Designer of the year 노미니가 되었다. 당시 정식 회사가 등록이 안되어 나를 찾을 수 없어 애를 먹었다는 웃긴 뒷이야기도 들었다. 싱가폴에서 여러 이벤트와 팝업샵을 하며 Takashimaya 입점을 기반으로 빠른 성장을 했다. 파리에서 팝업을 열기도 했고, LA Fashion Week에서 패션쇼도 열 수 있었다. 밀라노에서 Si Sposaltalia Collezioni 브라이덜 전시회에도 참가 했고, Indonesia Disital Fashion Week에서도 패션쇼 협업을 진행했다. 싱가폴의 산토사 섬에 있는 W 호텔 부띠끄 샵에 입점을 하며 중국에서 가장 핫한 곳 신티엔디(신천지, 新天地, xīn tiān dì) 에도 팝업을 열고, 상해 (Shanghai) 와 슈저우 (Suzhou)의 W 호텔 부띠크 샵으로도 진출할 수 있었다.
모든 영혼을 끌어와 공들인 디자인을 바탕으로 잠을 줄여가며 회사 전반적으로 유동성을 가지고 관여를 했고 하루 16~18시간 동안 정말 열심히 했다. 끊임없는 시도와 노력에 좋은 결과들도 많이 나왔지만 첫 사업은 철저하게 실패로 끝났다. 사업을 시작한 2015년 말부터 동의없이 떠났다 돌아온 파트너에게 운영을 넘긴 후 잠재적으로 회사에서 손을 땐 2020년 5월까지 5년 반은 무릎이 끊어질 정도로 아픈 성장통을 주었다. 앞서 얘기한 (https://brunch.co.kr/@kfinland100/12) 한꺼번에 몰려온 일들, 회사가 갚아야 할 빚 1억, 동의 없이 떠난 파트너, 남편의 20억 소송, 당장의 생활비 벌이, 시가의 문제 등은 나를 완전히 무너뜨리는데 도미노같은 역할을 했다. 분명 쓰디쓴 실패와 좌절로 내 자신을 잃어 버릴정도로 방황을 했고, 의욕도 관심도 없이 그저 그런 의미를 잃은 절망적인 삶을 6개월간 힘겼게 버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철저히 실패로 끝난 경험과 망한 기회에 감사한다.
고통은 컸지만 내가 받은 고통의 댓가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가 없이 소중한 것이다. 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안경을 가지게 되었다. 사업가로서 세상을 달리 보는 프레임이 생겼다. 나의 한계와 역량을 건설적인 비판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평생 공부해도 채워지지 않을 지혜가 아직도 내 주변에 너무나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또 세상에는 너무나 멋진 사람들만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겪었다.
사업 전의 내 삶은 '정말 작은' 우물안의 개구리였다. 사업을 통해 얻은 무엇보다 가장 큰 선물은 나에 대해, 내 삶의 목적과 방향에 대해 재조정을 했다는 것이다. 가족과 친구가 주는 의미, 진정 나를 응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양분화, 나를 지탱해주는 인생 가치관, 행복과 성공에 대해 다시 한번 수없이 질문하고 나만의 답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사업의 실패와 좌절을 하지 않았다면 나의 능력을 베풀며 살고자 하는 마음도, 사람들을 더 이해하고 공감하며 사려는 노력도, 지금 이 책을 쓸 생각도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 놓은 작은 세계에서 내가 생각한 최고의 자리를 트로피처럼 진열하며 살았을 테다. 실패를 통해 마음의 바닥 끝까지 패대기쳐질 기회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도 포장된 삶에 집중하며 살았을테다. 그러지 않아서 정말 천만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