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오르그 그로스 <사회의 기둥>
[명화와 역사] 37, 히틀러와 뮌헨 협정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5년이 된 1934년에도 베르사유 조약은 여전히 독일인들에게 수치와 치욕으로 남아있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라인란트를 비무장지대로 설정해야 했으며, 군사력도 제한되었다. 이러한 제약들은 독일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고, 1934년 히틀러는 그러한 독일인들의 불만을 십분 활용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독일 국경부근의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엄격한 세관원의 아들로 테어난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실업학교를 자퇴하고, 화가를 꿈꾸며 빈 미술대학에 진학하려고 하였으나 2번이나 낙방하고 만다. 이후 그는 잠시 그림 엽서를 그려서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후 1차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군대에 입대하여 무공을 올려 1급 철십자장을 받고 제대하였다. 전쟁후에는 탁월한 대중 연설가로 변신하면서 당시 작은 정치집단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한다. 이후 당명을 독일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일명 나치스)로 바꾸는 이 당의 당수가 되어 당기를 디자인했으며, 반 유대주의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1930년 총선거에서 나치스는 18.3%로 사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으며, 1932년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36.8%까지 득표하였으나 힌덴부르크에게 패하였다. 1년후에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정계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수상으로 임명되었고, 1934년에는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총통이 되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키면서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은 해군과 공군을 보유할 수 없었음에도, 히틀러는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를 무시하고 해군, 공군을 창설했으며 또한 군 복무 의무제를 실시하고 55만 명의 병력을 보유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한편 독일의 막무가내식 행보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은 독일을 제재하기 위해 스트레사(Stresa) 합의를 도출해냈다(1935년). 라인란트 비무장지대 설정, 오스트리아 독립 약속 등이었다. 히틀러는 이러한 조치가 굉장히 못마땅했지만 당장 이들과 맞설 수는 없었기 때문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냈다. 히틀러는 스트레사 합의의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하면서 사태를 무마시켰다.
독일을 상대로 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스트레사 합의는 성과를 거두는 듯했으나 이들의 공조는 곧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1935년 6월 영국이 프랑스와는 아무런 협의도 없이 독일과 단독으로 해군협상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독일이 재무장을 선언하면서도 영국에게 영국 해군의 35%만 보유하겠다고 하며 영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고, 영국에서도 이에 화답해서 양국의 잠수함을 100대 35로 규정하는 것에 합의했다. 이에 프랑스는 영국에 큰 배신감을 느끼는 한편 이탈리아는 다른 마음을 먹게 된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했고 이러한 침략행위에 국제사회는 이탈리아를 제재를 하게 되며, 이에 이탈리아도 스트레사 합의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독일을 둘러싼 스트레사 체제는 완전히 붕괴했다.
결국 1936년 3월 독일군은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에 진입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즉각적으로 행동을 보인다면 즉시 퇴각할 계획이었지만 프랑스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독일의 재무장과 함께 라인란트 재무장 사건으로 인해 베르사유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국제연맹은 독일을 제어할 수 없었음은 물론 스스로 와해되었다.
이에 더 나아가 히틀러는 1937년 3월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하였고, 4월에 실시된 독일, 오스트리아 지역의 국민투표에서 병합 찬성률은 97%에 달했다. 탄력받은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계 주민이 많이 사는 독일 접경지인 ‘수데테란트(Sudetenland)’를 독일에 합병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유럽 전역에 엄청난 논란 거리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1938년 9월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대표들이 뮌헨에서 모여 회의를 하게 되었다. 당사자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표는 회담장에 입장도 못하고 그들의 결정을 들어야만 했다. 뮌헨 협정의 결과 체코슬로바키아는 280만 명의 인구와 영토의 1/6, 석탄 생산의 2/3와 전체 산업 시설의 40%를 총알 한 번 쏴보지도 못하고 독일에 빼앗겼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물론 시간을 벌겠다는 계산은 영국과 프랑스의 판단 착오로, 독일이 군비증강을 하는 속도가 훨씬 빠름으로써 오히려 독일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 재무장에 대한 안이한 대처가 2차대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독일 화가 게오르그 그로스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 <사회의 기둥>에서 나치가 급성장하고 있는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계급을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비판하고 있다. 맨 앞의 귀가 막힌 정치가는 맥주와 검을 들고 있고 머리에는 말을 탄 기병장교가 들어있으며 넥타이에는 나치를 상징하는 하켄 크로이츠가 그려져 있다. 작품의 왼쪽에는 신문을 든 언론인이 있는데 서양식 요강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통해 그로스가 지식인의 무책임을 비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른쪽에는 자신의 당기를 든 사민당 의원이 위치하고 있다. 가슴에는 “사회주의는 일자리다”라는 구호가 새겨진 인쇄물을 들고 있지만 머리 속에는 똥만 가득한데 노동자 파업을 탄압하는 사민당의 위선을 비판한 것이다. 그들의 뒤에는 평화를 말하며 학살을 용납하는 술 취한 성직자가 그려져 있고, 그 뒤로는 무기를 든 병사들과 불타는 건물이 보인다. 히틀러의 등장을 예고하는 이 그림으로 인해 그로스는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아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 게오르그 그로스(George Grosz, 1893~1959) <사회의 기둥> (1926), Oil on Canvas, 200x108 cm, 베를린 국립미술관
** 찰리 채플린이 히틀러를 풍자, 비판하여 만든 영화 ‘위대한 독재자’ (1940)
https://www.youtube.com/watch?v=ureHNEmgQao
** 찰리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서 이발사 채플린이 브람스 ‘헝가리 무곡’에 맞추어 면도하는 장면
https://www.youtube.com/watch?v=bx1Xh5bLoq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