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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말할 수 있다.

김경희

by 김경희


신혼 시절을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새살림을 시작하게 되면서 저질렀던 이런저런 실수 때문에. 주말 점심에 신랑에게 김치찌개 끓여주려 했다가 김치 볶음 만든 일, 애써서 반찬 만들고 국 끓여 상에 올렸는데 전기밥솥에 생쌀이 그대로 있어서 난감했던 일, 미꾸라지 해감시키다 놓쳐 바닥에서 팔딱거리던 미꾸라지 잡아달라고 남편을 직장에서 불러낸 일 등등.



지금이야 눈 감고도 할 수 있게 된 일들이 그땐 왜 그리 서툴렀는지, 요즘 새댁인 며느리와 딸이 처음 해서 먹는 음식도 뚝딱뚝딱 잘 해내는 것을 보면 신혼 시절의 나는 무지렁이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요즘 새댁들이야 어떤 음식이든 검색만 하면 만드는 법이 여기저기 나와 있으니 나의 새댁 시절과는 다른 환경이라 그러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신혼 때 있었던 일 중 오래도록 비밀에 부쳐둔 사건이 하나 있었다. 결혼하고 초대를 무척이나 기다리던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전화 한 통이면 배달음식으로 상을 가득히 채울 수 있는 요즘이라면 무슨 어려움이 있었을까? 하나에서 열까지 손수 음식을 만들어야 했던 그때 메뉴를 정하고 준비할 재료의 목록을 뽑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때 당시에는 집에서 탕수육을 튀겨내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이라 정육점에 들려서 돼지고기를 사고 잡화점에 들려 녹말가루, 밀가루, 콩기름을 샀다. 손님 초대 상에 잡채는 기본이었으니 당면, 시금치, 당근, 버섯 등등의 재료도 샀다.



이런저런 재료들을 양손 가득 들고서 돌아 나오는데 시장 어귀에 길쭉하게 묶여있는 미나리 다발을 땅바닥에 놓고,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나는 할머니가 왠지 측은해 보여서 메모장에는 없었으나 미나리 한 단을 샀다. 미나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할 일도 많은데 미나리를 괜히 샀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파릇한 나물 하나쯤 상에 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탕수육을 만들었다. 바쁜 마음으로 잡채를 만들고, 국을 끓이고, 밥을 하고 나서 뜨거운 물에 미나리를 삶았다. 삶아놓은 미나리 색감이 어찌나 싱그러운지 비단실에 초록색 물을 들여놓은 것처럼 고왔다. 데친 미나리를 찬물에 씻어 숭덩숭덩 잘라서 물기를 꼭 짰다. 볼에 물기 짠 미나리를 담고 마늘과 조선간장, 참기름, 깨소금을 적당히 넣고 조물조물 무쳤다. 간이 싱거운지 짠지 한 가닥 입에 넣고 오물거리니 향긋한 미나리 향과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어우러져 엄마가 무친 나물처럼 맛있었다.



서둘러서 조기까지 굽고 나니 딩동! 초인종을 누르며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접시 가득 탕수육과 잡채를 담고 미나리나물, 조기구이, 소고기뭇국에 하얀 쌀밥까지 넉넉하게 담아냈다. “이걸 네가 다했어?” “와~” 차려진 밥상 앞에서 친구들의 과한 반응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친구들은 접시 바닥이 보일 때까지 음식을 먹으며 신나게 떠들다 돌아갔다. 무엇보다 음식을 거의 남기지 않은 것을 보면서 집들이 음식은 대체로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먹고 돌아간 밥상을 보며 맥이 풀렸지만, 설거지가 남았으니 쉬고 싶은 마음을 접고 설거지통에 빈 그릇을 하나씩 날랐다. 국 대접과 밥공기, 탕수육이 담긴 접시와 잡채 접시까지 옮긴 후, 미나리나물을 담았던 접시를 옮기려는데 접시 위에 까만 콩같이 생긴 조그만 알갱이가 서너 개 흩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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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뭘까?'


' 미나리 무칠 때 구슬을 넣고 무친 것도 아닌데 왜 알갱이가 여기 있는 걸까?'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한참을 갸우뚱거리다가 젓가락으로 동그란 것을 쓱 눌러보았다. 콩알처럼 동그란 알갱이는 젓가락에 힘없이 뭉개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에구머니나. 검정 알갱이들은 바로 미나리가 데쳐질 때 함께 데쳐져 동그랗게 말린 거머리의 시체였다. 순간 징그러운 생각에 온몸이 오싹거리는 것을 참으며 남편에게도 먹이려고 한 접시 남겨놓았던 미나리나물을 쓰레기통에 가차 없이 버렸다. 미나리를 버린 접시 위에도 까맣고 동글동글한 알갱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뜨거운 물에 익었으니까 거머리가 살아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쓰레기통에 버리면 다시 살아나서 여기저기 굼덕굼덕 기어 다닐 것만 같아 소름이 끼쳤다. 거머리 시체가 놓인 접시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 뚜껑을 들고 거머리를 탈탈 털어 넣고 물을 여러 번 내리자 그제야 소름 돋았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친구들에게 한 명씩 전화를 걸었다. 미나리나물 안에 거머리가 있었다는 얘기는 차마 꺼내지 못하고 그냥 잘 돌아는 갔는지, 무슨 선물을 그리 비싼 걸 사 왔냐는 얘기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친구 중에는 임신한 친구도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웩웩거릴 것 같아서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미나리나물은 데치기 전에 미나리 안에 있는 거머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 뒤로 친구들에게 언젠가는 꼭 털어놓아야지 생각만 하다가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다. 그러다 친구들도 나도 아이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나서야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마음이 들어 그때의 일을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얘들아. 신혼 때 우리 집 집들이에 너희들이 왔었잖아. 그때 말이야. 미나리나물에 거머리를 같이 삶아서 무쳤지 뭐야.”

뭔 소리를 하느냐며 어리둥절하던 친구 중 한 친구가

“푸하하”

웃으면서

“나도 알고 있었어. 그때 내가 미나리나물을 거의 다 집어먹었는데 접시에 까만 알갱이가 있는 거야. 순간 거머리라는 생각이 들어 오싹했는데 새댁인 네가 당황할까 봐 모르는 체했어."

“너도 알고 있었어?”

나의 뒤늦은 고백에 친구들은 그게 뭐 어때서라는 반응을 보였고

“그때 모두 별일 없었잖아”

라며 오히려 나한테 별 걸 다 기억하고 있다고 나무랐다. 검은 알갱이가 거머리라는 것을 그때 알았던 친구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또 친구들에게 얼마나 얘기하고 싶었을까? 삼십 년이 넘도록 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준 친구를 보며 친구란 미숙한 허물까지도 덮어주는 이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는 날 동안 포근히 덮어주는 묵직한 이불이 있으니 얼마나 든든한지.






주먹구구 레시피



<재료 준비>

미나리, 국간장, 마늘, 참기름, 통깨


1. 미나리를 식초에 담가 거머리를 제거한다.

2. 펄펄 끓는 물에 미나리를 데친다.(30초 정도)

3. 데친 미나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간장, 마늘, 참기름, 통깨를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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