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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an KIM Oct 12. 2017

[ESC] (8) 제주도 여행기

제주도 여행기를 빙자한 김훈 독후감

제주도와 글쓰기 고민

5일부터 10일까지 제주도를 여행했다. 제주도를 여행했다고 쓸 때 뭐라고 써야 할까. ‘제주도의 풍광은 실로 놀라웠다’라고 써야 하나. 누군가가 들려준 자기소개서의 대원칙이 있다. “나의 문장을 다른 사람의 자기소개서에 붙여 넣었을 때 자연스러우면 안 된다”. 글에도 사람의 인격이 묻어나게 되어 있어, 어찌 보면 모든 글은 글쓴이의 자기소개서나 마찬가지다. 나의 문장이 다른 사람의 글에서 자연스럽다면 그것은 나의 문장이 아니라 남의 문장일 뿐이다. '제주도의 풍광이 실로 놀랍'지 않을 사람이 있었을지 의문이다.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가장 강렬했던 자극은 사실 제주도가 아니라, 여행 중 심심풀이로 읽던 김훈이었다. 그래서 나의 오랜 친구 권과 통화하던 중 요즘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를 읽는다고 자랑했다. 권에 따르면 사람들이 김훈 작품을 많이들 필사한단다. 김훈의 문장에는 현대 국어의 모든 정수가 녹아있다. 그건 맞다. 김훈의 글 중 적어도 하나는 근 미래 국어 교과서에 필히 실릴 것이고, 반드시 실려야 한다.


김훈의 문장은 필사하기 적합한 텍스트가 아니다.

그러나 김훈의 문장은 우리네 범인이 평소에 사용하고 갈고닦는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그래서 필사하기 적합한 텍스트가 아니다. 김훈의 문장에는 논리 전개, 의표를 찌르는 감정의 전개, 사물의 적확한 묘사, 온갖 사회과학 개념들이 모두 어지러이 녹아들어 있어서, 우리네가 완성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많이도 넘어서 있다. 이런 문장과 글은 김훈만 쓸 수 있지, 우리에게 넘어오면 이미 죽은 글이 되어버린다. 이는 마치 간단한 뉴에이지 곡을 작곡하기 위하여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Transcendental Etudes)을 필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선진제도가 좋답시고 시민의식조차 미미한 후진국에 골조만 이식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김훈의 문장은 필사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김훈처럼 단어를 구사하고 문장을 조립하며 질긴 글을 직조해 낼 수 없다 하여, 그 글을 씹고 맛보면 안될 일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김훈의 글에 녹아든 사랑과 관찰의 따스함 그 드높은 수준과 이상을 지면뿐만 아니라 우리네 마음에도 새기고, 무엇보다도 김훈이 몸소 보여주는 한글 문장력의 새로운 지평을 체험하면, 우리네 개별적인 삶이 드높여지고 아마도 사회 전체의 보편적 수준이 높아지지는 않을까. 그러고 보니 책이나 글쓰기 얘기만 나왔을 거면 참말로 제주도는 왜 갔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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