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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l 28. 2021

기회는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니다

장담하기 힘든 내일로 꾸준히 전진한 이들의 완성과 성취의 시간에 대하여.

매일 200자 원고지 20매를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글이 잘 써져도 20매만, 잘 써지지 않아도 20매까지는 쓴다. 이것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장편소설을 집필할 때 준수하는 원칙이다. 그러니까 세계적인 소설가도 별 수 없다는 걸 안다. 그저 꾸준히 쓰는 것 외엔 방도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상의 재능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결과에 이르기 위해선 꾸준한 과정 위를 달리는 수밖에 없다. 때때로 가파르고 험한 길을 만난다고 해도 말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책을 판 작가로 알려진 J. K. 롤링은 한때 갓난아이의 분유를 사줄 돈도 없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영국 에든버러의 누추한 단칸방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싱글맘으로 살아가면서도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일주일에 70파운드, 한화로 10여만 원의 지원비를 받으며 홀로 생후 4개월 된 딸을 키우는 통에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고, 분유를 살 돈이 없어서 아이에게 맹물만 먹여야 하는 날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 K. 롤링은 틈틈이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집 근처에 자리한 카페 구석 자리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타자기를 눌렀다. 그렇게 9개월의 시간을 들여 탈고한 책을 출판사에 보냈지만 대부분의 출판사에서는 아이들이 읽기엔 내용이 너무 방대하다는 이유로 출간을 거절했다. 하지만 결국 뜻이 맞는 편집자와 출판사를 만났고, 500부 남짓한 초판 인쇄 계약을 맺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J. K. 롤링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린 마법의 주문이 됐다. 


대단한 명망을 얻었다고 해서 삶이 늘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하드보일드의 대가로 꼽히는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도 만만찮은 시절이 있었다. 종군기자로서 제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에서 목격한 생생한 현실을 반영한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명성을 얻은 헤밍웨이는 그 이후로 10년 만에 발표한 신작 소설이 변변찮은 평가를 받으며 고전했다. 


당시 쿠바 아바나에 머물고 있던 헤밍웨이는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에 마음을 기울였다. 낚싯대에 걸린 커다란 황새치를 잡기 위해 망망대해에서 나흘 밤낮을 홀로 사투를 벌였다는 어느 늙은 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헤밍웨이에게 반짝이는 영감을 안겼다. 그렇게 집필을 시작했고 비로소 자신의 대표작으로 불릴 명작 <노인과 바다>를 완성했다. 인생을 건 낚시를 벌인 노인처럼 작가로서 긴 시간을 숙고한 끝에 숙원의 걸작을 만난 셈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른 나이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20대 중반부터 청력 장애에 시달렸고 끝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일찍이 유서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청력을 잃은 후로 베토벤은 그의 대표적인 교향곡으로 꼽히는 ‘영웅’, ‘운명’을 비롯한 수많은 명곡을 작곡하며 불멸의 성악으로 남게 됐다. 그에게 청각의 상실은 음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없게 됐지만 누구도 듣지 못했던 음악에 마음을 기울이기 위해 노력했다. 


누구나 위대한 꿈을 꾼다. 하지만 시작부터 위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크 나이트>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연출하는 작품마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에게도 통과의례 같은 시작점이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 데뷔작 <미행>은 아내와 함께 설립한 제작사의 첫 작품이었고, 단돈 6천 불 수준의 저예산 영화였다. 심지어 런던 시로부터 촬영 허가를 얻지 못한 탓에 흔히 게릴라 슈팅이라 일컫는 도둑 촬영을 일삼았고, 주말에만 촬영이 가능했던 터라 1년여 만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힘겹게 찍은 이 데뷔작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지금을 만드는 반석이 됐다.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반향을 얻은 이 작품은 북미 두 개 극장에서 상영해 5만 불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플래시백과 플래시 포워드 서사의 충돌을 시도하고 타인의 기억을 조작하고 지배하는 인물의 행위를 그린 <미행>은 <메멘토>와 <인셉션>을 위한 좋은 선행학습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기회란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움직이는 자를 위한 시간이다. 미국의 대문호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속 문장처럼,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그곳이 어디든 시작해야 한다. 꾸준해야 한다.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 아니, 그것만이 답이다.


(이 글은 한전 KDN 매거진 <KDN LIFE>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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