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한강 작가의 전작 <희랍어 시간>과 소설집 <노랑무늬 영원>, 그리고 오늘 오전에 받은 <흰>을 연달아 읽었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에 이어 총 다섯 권의 작품들을 읽었네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들이 워낙 강한 면역작용을 일으켜서 그런지 이번에 읽은 작품들은 비교적 담담하게 읽어나갔습니다.
하지만 읽고 난 후의 느낌은 비슷하네요. 사실 그의 작품들은 줄거리나 결말이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과정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치밀하게 묘사되는 심리. 그리고 주인공마다 한 두 가지씩 가지고 있는 상처 혹은 트라우마.
<희랍어 시간>은 어젯밤에 읽고, 오늘 아침에 한 번 더 읽었습니다. 한강 작가의 책들은 꼭 두 번씩 읽게 만드네요. 읽고 나서도 뭔가 석연치 않게 남아 있던 작은 뼛조각 같은 느낌에, 그걸 빼내기 위해 한 번 더 읽게 되지만 되려 더 큰 조각에 목이 매이거나 식도에 걸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먹먹함. 그것도 중독성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한강 작가의 글들을 좋아하게 된 건 그 문체와 그 먹먹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읽어본 작품 중에선 저는 <희랍어 시간>이 가장 좋았습니다. 우연하게도, 제가 아주 오래전에 썼던 단편소설과 비슷한 점도 있고요. (저는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아이와 귀가 들리지 않는 여자아이의 사랑이야기였습니다만, 습작 수준이라 내보이기는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희랍어라고는 알파벳을 읽을 줄 밖에 모르지만 본문 곳곳에서 나오는 그 문장들(전자책에선 폰트 문제로 잘 안 나타나는 게 아쉽습니다. PC버전에서 다시 봤어요)이 신비로움마저 주더군요. 그러한 소재가 왠지 이 소설의 분위기를 더 이끌어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노랑무늬 영원>은 약 8년간에 걸쳐 쓴 중, 단편소설 모음집인데 어느 하나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여러 작품들을 통해 시기에 따른 작풍의 미묘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저자를 모른 채 작품집을 읽었다면 그의 작품인 줄 모르고 읽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흰>은 독특한 책입니다. 이미 알려진 대로 65편의 시 혹은 단문들이 단독으로, 또는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굳이 연결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어도 좋습니다. 저자는 이미 키워드를 생각해두고, 그에 맞추어 글을 써나간 것이니까요.
이 책은 종이책으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우선 종이 자체가 백상지처럼 아주 흰색입니다. 종이책들은 보통 미색지를 많이 사용하는데 일부러 백상지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백상지가 더 좋다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눈에는 피로감을 줄 수도 있지요) 이 책이 의도하는 바를 표현하기 위해선 적절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아주 깨끗하다는 느낌입니다.
또한 중간중간 페이지에 걸쳐 (그러니까 두 페이지에 걸쳐) 컬러사진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차미혜 사진작가와의 협작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사진들이 전자책으로 보면 이상하게 보일 듯해요. 그 느낌이 안 살아날 것 같으니 종이책으로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 책 역시 먹먹합니다. 표현 하나하나가 그렇습니다. 시집처럼 가끔 꺼내어 아무 장이나 펼쳐 읽어도 좋을 듯합니다.
당분간은 그 여운과 먹먹함이 지속될 듯싶습니다. 아마도, 한강이라는 작가가 무슨 상을 받았더라는 것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갈 때쯤 저도 잊어가다가, 흰 눈이 오면 다시 생각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