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 후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칼란드리아 Oct 04. 2022

한강 <채식주의자>

*2016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등 세 편의 중편소설로 엮어져 있습니다. 각각 다른 시기에 순차적으로 다른 문예지에 실렸던 작품을 한데 모은 것인데, 각각이 독립적이면서도 연속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또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가에 대한 인과관계의 설명도 부족합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채식주의자를 선언한 영혜로 인해 벌어진 사건들, 그리고 그로 인한 한 가정 (정확하게는 세 가정)의 파국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한 영혜를 둘러싸고 남편, 형부, 언니라는 세 사람의 시선에서 기술하고 있으며, 이전의 사건이 이후의 사건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친 이후의 시점 변화라서 동일 사건에 대한 각각의 시각을 동시에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앞의 사건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정도로 각각의 작품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혜가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은 '꿈' 때문인데, 그 꿈은 실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개에 대한 트라우마가 꿈에 나타난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지만 그 이외의 꿈들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군인 출신의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폭력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주었고, 그게 내재된 것이 꿈으로, 육식에 대한 거부로, 그리고 자해와 정신병으로 이어진 것 일는지도 모릅니다.


'채식주의자'라는 명칭이 주인공에게 적합하며, 같은 명칭이 이 소설의 제목으로 적합한가 하는 점은 본문과 해설에서도 나와 있듯이 사람들이 그저 편의에 의해 붙인 것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녀는 육식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 거식증으로 생명의 위태로움마저 감수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이쯤 되면 작가가 참 잔인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책에는 다소 긴 해설이 '열정은 수난이다'라는 제목 아래 여러 소제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목은 내가 이거 읽고 쓰느라 고생했다는 뉘앙스인 것 같아요. ㅋ) 뭔가 의미가 있을 듯하지만 유추하기는 쉽지 않네요. (갑자기 든 생각이, 혹시 종이책에서의 페이지 번호였을까요?) 그러나 각각의 소제목에서는 다음과 같인 시점으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편의상 인물관계는 영혜를 중심으로 할게요)


하얀 집의 붉은 벽 - 소설 속의 사건들이 지나간 후의 언니를 바라보는 평론가
갤러리 71: 에너지의 수혈 - 형부에 대한 이해를 위한 변명(?)
갤러리 8.93 : 목소리를 삼킨 - 영혜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
갤러리 1 : 단순하게 냉정할 것 -  남편의 입장은 이러했을 것이다
갤러리 42.195... : 일상은 수난이요 - 어쩌면 가장 큰 피해자일 언니 (아마도 마라톤 거리를 얘기하려 했던 듯한데 뒤에 의미 없는 숫자들은 무엇인지)
붉은 집의 하얀 벽 - 답답했던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의 소감 (그녀는 누구일까요)


대충 해설의 구조는 위와 같습니다. 해설도 전반적으로 읽기에 어려움은 없었습니다만, 허윤진이라는 평론가의 지식의 배경이 이공계가 아님에도 군데군데 이학적인 표현이 나타나는 건 그냥 작가의 취향 또는 그럴싸하게 내세우고 싶음이라고 하고 넘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기술은 특히 형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많이 나오는데 그 의미를 정리해보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선 이 부분만 보기보다는 소설을 읽은 후 해설의 전후 맥락을 같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형부는 특정부위(몽고반점)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영혜가 아직 몽고반점이 있다는 그 말 한마디에 트리거가 작동하듯 욕망에 사로잡히고, 연쇄적으로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고 결국 파멸로 치닫습니다. 그의 욕망이 '앎에 대한 욕망'으로 미화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육체적 관계에 대한 욕망'일 수밖에 없고, 불륜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설사 영혜와의 관계가 '식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우연히, 그리고 둘 다 정신적으로는 정상이 아닌 상태가 되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합일) 그것은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적 통념(인력과 척력의 균형감) 속에서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예상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현란하게 기술은 했지만 결국 한 마디로 요약하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린 위험한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그러한 은밀한 음란함은 필연적으로 목격자가 있기 마련이고, 여기에서는 언니가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고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저는 이 과정에서 제 전공과 관련된 몇 가지를 떠올렸습니다. 먼저 자연계에 존재하는 가장 강한 힘인 핵력을 유지하게 하는 것을 설명하는 유가와의 중간자 이론, 그리고 에너지 준위와 관련된 이론인 슈뢰딩거 방정식, 소립자 물리학을 위한 실험장치인 CERN의 입자가속기 및 거대 입자 충돌기, 핵융합을 위한 플라스마 장치 등... 뭐 별 의미는 없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마이너스 표시가 된 것 중 전자는 에너지가 들뜬상태에서 다시 바닥상태가 될 때 방출(-)되는 에너지로 인한 비가역성, 그리고 그로 인하여  개체에 해(-)가 될 것이 명백함을 의미하고, 후자는 들뜬상태로 가더라도 그것이 양성이 아니라 음성적인 방향성을 갖는 에너지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전자 궤도 모형에서 전자의 에너지 준위와 관련된 것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바닥상태의 전자가 외부 에너지에 의해 들뜬 상태가 되었다가 다시 바닥상태가 되는 것은 가역적이지만, 개체 수준에서의 에너지 전이는 비가역적이기에 에너지가 증가함에 따라 엔트로피, 즉 무질서도 역시 증가하여 결국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 무질서도 증가의 방향은 그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가게 되었지만 그것은 음성적인 방향이고 결국은 그 포텐셜 에너지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만 것이죠. (해설보다 더 어렵게 쓴 것 같은...)


생각나는 대로 적긴 했지만 이게 맞다 틀리다 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고요, 다만 그냥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정도로 생각하시면 어떨까 싶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리스 장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