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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Nov 28. 2022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세계

* 이 글에서 언급되는 작품 제목들은 국내에서 번역판으로 나온 해당 출판사의 제목을 기준으로 합니다. 


또한 아니 에르노 자신은 자신의 작품들이 '작품'으로 불리기를 원치 않고, '글쓰기'와 같은 행위, 진행적인 것으로 불리기를 원한다고 하여 이 글의 제목을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 '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편의상 '작품'으로 사용하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와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칼 같은 글쓰기>와 <진정한 장소>, 몇 편의 작품 해설을 참고하였으며, 다수의 작품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아니 에르노가 선정되었다. 지난달 초에 수상자가 발표되었을 때 나는 한 편으로는 그럴만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왜?'라는 생각을 했었다.


솔직히, 나는 아니 에르노라는 작가에 대해서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지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아니 에르노는 좌파 성향의 페미니즘 작가이고, 자신의 삶과 경험에 기반한 작품들을 써왔다는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최근에 논란이 되는 노벨문학상 위원회의 성향을 감안한다면 유력한 수상 후보이기도 했고 (후보에는 자주 오르는 것 같지만, 사실 노벨문학상은 후보를 공지하지 않기에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문학동네에서 올해 수상자 예측하는 투표를 할 때 나도 아니 에르노에게 투표를 하긴 했었다.



그러나 막상 수상자로 정해지고 나니 그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읽어본 바가 없기에 뭐라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나 스스로 모순적임을 느꼈고, 작품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침 독파에서 아니 에르노 특집으로 <단순한 열정>, <탐닉>, <집착>, <카사노바 호텔> 등 네 편을 연달아서 챌린지를 진행하였고, 이를 계기로 이 책들부터 읽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들부터 읽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그가 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이 작품들만으로는 그 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열정>을 읽었을 때는 여러모로 당황했다. 일단 너무 짧았고 (본문이 50페이지 남짓.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짧은 편이다), 불륜의 내용을 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설스러운 표현도 많았다. 아무리 봐도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큼은 아닌 듯했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 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 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단순한 열정> 중에서


이어서, <단순한 열정>의 기반이 된 <탐닉>을 읽었는데 내용이 좀 더 길어졌고, 사적인 내용이 많아졌을 뿐 큰 차이점은 없어 보였다. 물론 내면 일기이기 때문에 심리적인 묘사가 좀 더 자세한 부분은 있다. 


그러나 S와의 불륜에 대한 이야기 외에 작가 본인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과 열정이 나타난 부분이 많아서 작가에 대한 이해를 조금씩 더 할 수 있었다.


언제쯤이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물을 관찰할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들을 더는 쓰지 못할 것이다. 그 전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열정, 욕망, 질투가 빚어내는, 너무나 미세한 인간적인 움직임에 유의할 수 없을 것이다. 

...


이 고통 - 오늘은 약간 극복되었다 - 은 두 가지 사실의 결합으로부터 비롯된다. 글을 써야 한다는 필요성과 S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인식. 이 두 가지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진실이 밝혀져야 했다. 그러나 전보다 더한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뿐이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열정을 포기할 뿐이다. 그러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매우 모호하다.

...

그것은 하찮은 장난이 아니다. 글 쓰는 행위는 나에게 언제나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S에게 품은 것과 같은 그 열정과 글쓰기가 절대적 가치라는 것에 대하여 나는 강한 확신을 품고 있다. 그것들이 순수함과 아름다움에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과 함께. 작년 나는 그 당시 품고 있던 열정으로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문학계에 이전부터 갖고 있던 혐오감을 잠시 잊고 있었다. 

...

글 쓰는 행위 속에 자유가 존재하는지 이젠 확신할 수가 없다. 오히려 과거나 과거에 겪었던 공포감이 회귀하는 최악의 자기 상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반대로, 그 결과물인 책은 다른 사람들이 자유를 찾는 것을 돕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탐닉> 중에서


<집착>에서도 마찬가지를 느꼈다. 떠나간 한 남자를 향한 집착, 그리고 그 남자의 새로운 애인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래서일까, 그의 글들은 나의 가치관과 계속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물론 집착과 질투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일 수도 있지만. 그가 이 글을 쓴 이유는 그런 보편적인 감정을 자신의 예로 들어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여기에서도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생각은 여실히 드러난다. 점점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 했다. 나는 죽고, 더 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

게다가 나는 그 시기에 가졌던 욕망, 감각, 행위들을 추적하여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내가 겪은 대로의 질투를 써나가고 있다. 내게는 그것만이 이 강박관념에 물질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여전히, 늘 본질적인 무언가를 놓칠까 봐 두렵다. 글쓰기는 결국, 실재에 대한 질투와 같다.

...

글쓰기를 통해 나의 강박증과 고통을 여기에 노출하고 있는 행위와, 랍대로에 가면 그들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출을 두려워하던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글쓰기,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다.

...

글쓰기는 더 이상 내 현실이 아닌 것을, 즉 길거리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엄습하던 감각이다가, 제한되고 종결된 시간 동안 '집착'이 되었던 것을 보전하는 방식이었다. 

<집착> 중에서


그리고 <카사노바 호텔>에서는 그의 단편적인 글들이 모여 있어서 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나중에는 그것들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 이 작가 뭔가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에는 탐구하듯이 작품들을 찾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선 아니 에르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책들을 우선 읽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게 이전 게시물을 먼저 작성한 이유다.





위 게시물을 작성할 때도 그의 작품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닌지라 약간 추측성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작성 중인 이 글을 쓰는 상황에서는 그의 작품을 거의 대부분 읽어본 후라 좀 더 명확하게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책들을 다 읽느라 두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나기도 했다)


우선 내가 읽은 책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단순한 열정>, <탐닉>, <집착>, <카사노바 호텔>, <사건>, <남자의 자리>, <한 여자>, <부끄러움>, <빈 옷장>, <세월>, <다른 딸>,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얼어붙은 여자>, <칼 같은 글쓰기>, <진정한 장소>, <사진의 용도> 등 총 16편


이 외에도 번역된 두 편 정도의 작품이 더 있지만 이 정도로만 해도 충분하고 주요한 작품들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작품 중에 하나인 <바깥 일기>는 국내에 번역본이 나와 있지 않은데 이유는 모르겠다. 노벨문학상 특수를 고려해서 조만간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저 책들은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이 되었는데 특히 정혜용 번역가님, 신유진 번역가님의 작품들이 많다. 특이한 점은 상당수가 1984Books라는 1인 출판사에 의해 기획되어 출판되었다는 점인데, 그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은 이번 수상을 계기로 모든 작품을 밀리의 서재에서 제공하기도 한다. (아마 10월 말이나 11월 초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나도 이미 구매한 몇 권을 제외하곤 나머지는 밀리의 서재를 통해서 읽었다)


사실 아니 에르노가 국내에서 알려진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이미 1990년대부터 번역본이 나오고 있었으며,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책들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또한 고정된 팬층도 있었던 것 같다.


그중에는 출판사마다 번역된 제목이 다른 것들도 있는데, 그러다 보니 한 작품 내에서 다른 작품을 언급할 때 다른 제목으로 얘기되기도 하므로 알아서 매칭을 해줘야 한다. 예를 들어 <빈 옷장>은 <빈 장롱>으로 언급되는 경우도 있고, <남자의 자리>는 <아버지의 자리>로, <한 여자>는 <어떤 여자>로 언급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장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사실 성장 배경은 따로 찾아볼 필요는 없고 작품들을 읽다 보면 알 수 있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에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릴본이라는 곳에서 외동딸로 태어났고, 이후 5살 때 이브토로 이사 간 후 그곳에서 중학생 때까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를 다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장 노동자였으나 결혼 후 식료품점 겸 카페(식당)를 운영했고, 아니 에르노가 결혼한 후인 1970년에 폐업했다.


루앙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던 아니 에르노는 같은 학교 출신의 남편을 만나 1964년에 스물넷의 나이로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지만 1982년에 이혼하여 두 아들을 맡아 키우게 되었다.


아니 에르노는 문학교수 자격증을 취득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원격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후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아니 에르노의 생애에서 주요한 경험이 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의 목록을 함께 적어본다.


어린 시절 및 학창 시절 - 빈 옷장, 남자의 자리, 한 여자, 부끄러움, 세월, 얼어붙은 여자, 다른 딸

낙태 (1964년) - 빈 옷장, 사건

결혼 생활 (1964~1982년)- 얼어붙은 여자, 세월

아버지의 죽음 (1967년) - 남자의 자리, 부끄러움

어머니의 죽음 (1986년) - 한 여자, 부끄러움,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언니의 죽음 (나중에 알게 된 사실) - 다른 딸

(구) 소련 외교관 S와의 만남 (1988~1989년) - 단순한 열정, 탐닉

기타 연애 경험 - 집착, 사진의 용도


그 외에도 아니 에르노의 작품세계를 다룬 대담집으로 <칼 같은 글쓰기>와 <진정한 장소>가 있고, 기고문 및 미발표 산문, 소설을 모아서 펴낸 <카사노바 호텔>이 있다. (이는 이미 길리마르 콰르토 총서에는 수록된 바 있다)




위에서 보는 대로, 자신의 경험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것은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아버지 및 어머니와 연결된다. 가난한 노동자 출신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빈곤층들이 거주하던 구역에서 성장했던 어린 시절은 아니 에르노에겐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고, 잊고 싶은 기억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노르망디 지역은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지역이 아닌가. 그가 성장하던 때는 전쟁은 끝나고 복구작업이 한창인 때였지만. (그래서인가, 그는 전쟁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인다)


이에 그의 초기작인 <빈 옷장>에서는 그 시기를 상당히 '폭력적인 글쓰기'를 동원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선 낙태 경험도 함께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러한 경향을 보인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세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세계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한다.


소설 - 빈 옷장, 얼어붙은 여자

자전적 이야기- 남자의 자리, 한 여자, 부끄러움, 단순한 열정 등 대다수

내면 일기 - 탐닉,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등


소설은 아니 에르노 스스로 소설로 구분한 작품들이다. 허구가 가미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빈 옷장>은 '드니즈 르쉬르'라는 가상의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그는 작가 본인이며, <얼어붙은 여자>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 역시 작가 본인임을 알 수 있다. <얼어붙은 여자>는 소설에서 자전적 이야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작품들을 소설로 구분한 이유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문체와 주제, 서술방식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얘기하기로 한다.


이후 그의 글쓰기는 자전적 이야기로 옮겨가고, 작품의 대다수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에 대해 그의 작품들이 과연 '소설'인가라는 논란도 있다. 모두가 실제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고, 명백하게 작가 본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로 보는 시각이 더 많으며, 단지 형식상 '소설의 한계의 극한'까지 도달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아니 에르노 본인은 <칼 같은 글쓰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 글에서 언급된 작품의 제목은 본문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자전적 이야기'라는 이 용어는 내게 그리 만족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분명 근본적인 하나의 양상을 부각하는 용어이긴 합니다. 글쓰기와 독서에서 소설가의 입장과는 철저히 대립되는 어떤 입장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텍스트가 겨냥하는 것, 즉 텍스트의 구성 작업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용어가 텍스트를 하나의 이미지로 축소시켜버린다는 것이지요. 즉 '작가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버지의 자리>, <어떤 여자>, < 부끄러움>, 그리고 부분적으로 <사건>은 자전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자전적 성격을 띠고 있어요. 그리고 <단순한 열정>과 <집착>에서 나는 나 개인의 입장을 떠나 좀 더 일반적인 개인적 열정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 제2기의 텍스트들은 무엇보다 '탐험'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여기서 관건은 '나'를 말하거나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나 조건이나 고통 등과 같이 더 방대한 어떤 리얼리티 속에서 '나'를 상실하는 것이거든요.

내 초기 소설의 형태와 비교할 때, 나는 어떤 엄청난, 따라서 당연히 경이로운 자유 앞에 선 느낌을 받습니다. 내가 허구를 거부함과 동시에 하나의 지평선이 사라지고, 형태상의 모든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지요.

<칼 같은 글쓰기> 중에서




자전적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남자의 자리>부터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담아낸 것이지만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소설로 구분되었던 작품들이 다소 '폭력적인 글쓰기'였다면, <남자의 자리>부터는 보다 '밋밋한 글쓰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비록 자신의 경험이긴 하지만, 그것을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글쓰기의 정치적 성격과 그 시도에서 문제 되는 것의 모든 중요성을 가늠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자리>를 쓰면서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피지배 세계 출신이지만 이제는 지배 세계에 속하는 화자로서, 내 아버지와 피지배 세계의 문화에 대해 말하겠다고 나 자신에게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도에 사회의 비참한 모습을 부각하려는 경향과 민중주의에 빠질 커다란 위험이 내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지요. 따라서 궁극적으로 이것은 내 아버지와 피지배 세계의 현실 - 이것은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입니다 - 을 보여주는 데 완전히 실패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

그렇게 된다면 나의 출신을 두 번 배신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첫째는 학교문화에 적응함으로써 하게 되는 배신으로, 이것은 진정 내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글쓰기를 통해 그리고 그 속에서 의식적으로 지배자의 편에 나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범하는 배신입니다. 

...

나는 그러한 선택을 명료하게 인식했고, 그 인식은 나를 '거리 두고 글쓰기'로 이끌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있죠. 나는 이 책 속에서 지배자들의 언어 도구, 그중에서도 특히 고전적인 문장 구조를 채택하고 있는데, 내가 선택한 글쓰기는 그러한 언어 도구를 사용하여 피지배자들의 관점을 문학 속으로 침입 혹은 난입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

내가 유일하게 '정확하다고 느낀 글쓰기는 표출되는 감정도, 교양 있는 독자와의 어떤 묵계도 없이 (초기 텍스트들에서는 그러한 묵계가 전혀 없지는 않았죠) 오직 거리두기를 통해 객관화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자리에서 내가 "평평한 글쓰기"라 부른 것이 이겁니다. "과거에 내가 부모님에게 중요한 소식들을 전할 때 사용하던 바로 그 글쓰기"죠.  

<칼 같은 글쓰기> 중에서


자신의 부모님, 그리고 어린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 같은데 이는 그가 언젠가는 떨쳐내야 할 숙명과 같은 것이 되었다.


내가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일을 마쳤다.


그는 <남자의 자리> 말머리에서 위와 같이 적었다. 이렇게 적은 이유는 그가 '계급 전향자' 혹은 '변절자'였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가난한 노동자, 소상인 출신이었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무리해서라도 자녀 교육에 애썼던 어머니 덕분에 사립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보다 큰 도시인 루앙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또한 교사가 되고, 부르주아 계층이었던 남편 필립 에르노와 결혼함으로써 마침내 상층부의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계급 전향은 또한 어머니의 꿈이기도 했지만, 본인은 이루지 못했다)


 <부끄러움>의 작품 해설에서 신수정 교수는 '계급'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얘기하고 있다.


사실, 종종 간과되어온 경향이 없지 않지만, '계급'은 아니 에르노의 영원한 테마에 가깝다. 그녀에게 1984년 르노도상을 가져다준 <남자의 자리>는 말할 것도 없고, 마흔일곱의 여성 작가가 가정이 있는 서른다섯 살 동구권 외교관을 향해 귀기 어린 열정을 발산하는 <단순한 열정>에서도 계급은 예외 없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다. 어쩌면 아니 에르노의 모든 열정, 탐닉, 집착, 그리고 부끄러움은 이 계급이라는 추상의 가장 생생하고도 구체적인 원초적 감정의 일단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에 따르면, 계급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계급은 '우리 동네'와 그 너머의 '저곳'을 가르는 경계선이자 '우리 동네 사람'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기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부모님과 어린 시절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고, 늘 마음 한편에서 그것이 걸렸다. 이에 그는 그것을 덜어내기 위해 이 작품을 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과 <부끄러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릴본과 이브토는 각각 L시, Y시로만 표기되고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다. 그것은 마치 금기처럼 말해서는, 기억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취급했다. 이후의 작품에서는 그러한 부담감을 떨쳐내었는지, 릴본, 이브토로 명확하게 표기되고 있다. 


장 주네는 "죄책감은 글쓰기를 추동하는 막강한 동력이다"와 같은 문장을 썼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자리> 첫머리에서 그의 문장을 명구처럼 떠올린 것도 아무 이유가 없진 않지요. 나는 이 죄책감이 결정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글쓰기의 바탕에 죄책감이 있다면, 나를 죄책감에서 가장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글쓰기라고 믿습니다.

<단순한 열정> 말미에 나타나는 '죄책감을 떠안은 재능'의 이미지는 내 책에서 내가 쓰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나 자신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입니다. 출신 계급을 변절한 처지에서, 정치적 행위로서 그리고 '헌납' 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바로 글쓰기라고 믿습니다. 

...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내 죄책감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사회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의 이동으로 축소될 수는 없는 문제지요. 나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그 죄책감은 사회와 가족의 문제, 그리고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은 어린 시절에 비례하는 성(性)과 종교의 문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태여 그 감정을 연구하거나 특별히 관심을 두지는 않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게 분명해졌어요.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의도성입니다. 그 의도성은 나 자신에 대한 탐구나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드는 것에 대한 연구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나 자신의 상실을 전제로 하며 물론 이것은 사회, 성(性) 등의 국면과 연계되어야 하죠! - 내가 '사람들' 혹은 '우리' 안에서의 융합을 전제로 하는 현실에 빠져들어야만 발견할 수 있는 무엇이죠. 

<칼 같은 글쓰기> 중에서




이러한 과정으로 넘어가는 중에 피에르 부르디외 교수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랑스의 사회학자로서 사회문제의 해결에 주력했고, 특히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집중했다. 아니 에르노는 이에 영향을 받아 글쓰기의 스타일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슬픔'이라는 글을 <르 몽드> 지에 기고하였고, 이는 <카사노바 호텔>에 수록되었다.


지금 의도적으로 존재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자신이 이렇다고 생각해오던 존재가 더 이상 그와 같은 존재가 아니며, 자신과 사회 안의 타자들에 대해 갖고 있던 견해는 찢겨나가고, 우리의 위치 및 우리의 취향 등, 외관상 가장 평범해 보이는 삶의 일들이 작동할 때 그 무엇도 더는 자연스럽지 않고 당연하지 않다. 자신의 출신이 조금이라도 피지배 계층과 관련 있는 경우, 부르디외의 철저한 분석에 대한 지적 동의에 덧붙여 체험된 자명성을, 이를테면 경험이 보장하는 이론의 진실성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과 지친이 몸소 상징적 폭력을 당한 경우 그것이 실재함을 부인할 수 없으니까.

사르트르의 경우, 그의 죽음으로 뭔가가 마무리되고 통합되고 그의 사유가 더는 힘차게 움직이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저물어가리라는 느낌이 들었던 반면, 피에르 부르디외에 대해서는 그런 감정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를 잃고 슬픔에 겨운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이렇게나 많듯이-내가 우리라고 말하는 경우가 몹시 드물지만 이번만은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마자 퍼져나갔던 우애의 감정을 고려하여 '우리'라고 감히 말하련다-그의 참신한 사유와 개념들과 저서가 미치는 영향이 계속해서 확장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우리 가운데 그만큼 많다. 가난한 자들이 자부심을 느끼게 만드는 글을 쓴다고 당대에 책망받았던, 누구로부터였는지 더는 기억나지 않지만, 장 자크 루소의 경우가 그랬듯이 말이다.

<카사노바 호텔> - '슬픔' 중에서


자신의 성장배경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이야기는 <한 여자>, <부끄러움> 등으로 이어진다. <부끄러움>에서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왜 부끄러운지를 썼다.



활자화된 글로 복원하고픈 욕구, 다른 어떤 것도 시도할 수 없다는 좌절감 등의 징후로 미루어보아 내가 이렇게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은 단숨에 모든 것을 노출하는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날것의 사실들일뿐, 노출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수년 전부터 고정된 이 장면, 나는 이것을 꿈틀거리게 만들어서 이 장면으로부터 신성한 징후를 (예를 들어 이 장면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고, 내 책의 밑바닥에 깔린 것이 바로 이 장면이라는 믿음 같은 것) 박탈하고자 했던 것이다.

...

부끄러움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나에게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부끄러움 뒤에는 오직 부끄러움만 따를 거라는 느낌.

...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이 부끄러움의 표식으로 변했다. 마당의 오줌통, 함께 자는 방(공간 부족으로 인해 우리 계층이 대개 그렇듯 나는 부모와 같은 방에서 잤다). 어머니의 손찌검과 거친 욕설, 술에 취한 손님들과 외상으로 물건을 사는 친척들. 술에 취한 정도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알고 월말이면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는 우리 삶에 대한 정확한 인식. 오직 이 인식만으로도 내가 사립학교의 무시와 경멸의 대상인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중에서




아니 에르노는 1999년에 문제작 <사건>을 발표한다. 24세 때의 일을 59세에 발표한 셈이다.


앞선 작품들이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것에 비해 <사건>은 발표 당시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이는 낙태라는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인데, 1964년의 낙태 시술은 불법이었다. 더군다나 이 책에서 사용된 방법은 의료인에 의한 것이 아니고 상당히 위험한 방법이었다. (누구의 아이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후 결혼하게 된 남자 친구의 아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무엇으로도 축소될 수 없는 여성으로서의 경험인 낙태를 보여주는 것은 어떤 증언을 남기는 것 이상으로, 그 시대와 사회와 신성의 척도를 측정한다는 의미를, 다시 말해 통과의례적 양상을 그 텍스트에 부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책을 통해 기억과 글쓰기에 대한 경험 하나를 새로이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 책의 거의 삼분의 일이 기억하는 작업과 글쓰기와 그와 같은 작업 사이의 관계 맺기에 바쳐졌으니까요. 여성 고유의 경험인 낙태가 더 이상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도도 있었죠. 내가 성공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요! 하지만 이 책이 불러일으킨 거북 한 감정이 기존 관념에 동요를 일으키는 조짐을 보여준 것만은 사실이에요. 

<칼 같은 글쓰기> 중에서


아니 에르노는 이 작품을  계기로 '낙태권'에 대한 논란을 가중시켰고, '페미니즘 작가'라는 타이틀을 공고히 하게 된다.




내면 일기로 분류되는 작품은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와 <탐닉>이 있다. 아니 에르노는 네 편의 내면 일기를 썼다고 하는데 그중 두 편을 출판했고, 둘 다 번역되었다. 이중 <탐닉>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하며 쓴 일기이다. 이 제목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글에서 인용했다고 하는데 사실 프랑스어 문법으로는 틀린 것이지만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혼자 살고 계신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와 같이 살고자 했지만 이내 문제가 생겨서 결국 어머니는 따로 살게 되었다. 이때 이미 행동 및 기억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았고, 여러 단계를 거쳐 요양병원에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요양병원에 계신 동안에도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결국 그곳에서 2년 만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작가의 심정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어서 (<탐닉>도 마찬가지였지만) 상당히 불편했고, 이렇게 출판해도 괜찮은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말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나는 자신을 위해, 나 자신을 은밀한 감정들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글을 썼고, 누군가에게 내 일기장을 보여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답니다. 이 충동적인 태도는, 다시 말해 미적 판단에 대한 무관심은,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대한 거부는(내 일기장은 언제나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져 있었죠!) 내가 출 판을 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도 여전히 나의 내면 일기 쓰기 속에 간직되었죠. 난 내 그러한 태도가 여전하다고 믿어요. 말하자면 어떤 독자를 '미리 염두에 두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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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쓰고 있는 책들과 내면 일기 사이에 늘 큰 차이를 두었어요. 전자의 경우, 모든 것은 글쓰기가 진행됨에 따라 실현될 하나의 목적에 맞게 실행되고 결정됩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시간이 이야기의 구조를 결정하고, 즉각적인 삶이 그 소재가 되지요. 따라서 이때의 글쓰기는 더 제한적이고, 덜 자유롭습니다. '하나의 리얼리티를 구성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단지 실존의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특별히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바도 기한도 없이 그저 순전히 거기 있음이라는 현상에 대해 무언가를 진술한다는 느낌이 더 강하지요. 

그러나 진정으로 내밀한 일기와 명확한 목적을 담는 일기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밖에서 쓰는 일기>와 <외적인 삶>이 그 경우죠. 이 책들은 내면적 성찰과 개인적인 에피소드에 의도적으로 등을 돌리고 있고, 그 속에 '나'라는 주어는 드물게 등장합니다. 이 책들에서 완성되지 않은 구조, 단상, 그리고 틀로서 제공되는 연대기는 일기 형태의 특성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선택과 의도에 따른 것이지요. 말하자면 도시적이며 집단적이고, 일상적인 현실의 사진을 찍고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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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와 <탐닉> 이렇게 단 두 권의 내면 일기만을 출판했어요. 이 일기들은 모두 십 년 전에 써졌고, 실제로 그 기간에 살았던 삶은 이미 각각 <어떤 여자>와 <단순한 열정>이라는 자전적 이야기의 대상이 되었지요.

이 두 가지 상황 - 십 년이라는 유예기간과 그 기간에 상응하는 책의 존재 - 가운데, 후자가 일기를 출판하도록 부추긴 좀 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유예기간도 중요하겠죠. 그 세월이 내가 나의 일기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볼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요. 이것은 '나'를 다른 존재로, 다른 한 여성으로 생각하 고 그 시기의 맥락에서 벗어나 분출되는 감정을 초월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글쓰기가 생산해내는 진실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일기를 출판하는 것은 먼저 나온 텍스트를 '작용하게' 하고, 그것에 어떤 다른 조명을 비추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게 열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기를 감출 권리가 내겐 없다고 느껴요. 루소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조각을 제공해 야" 합니다. 작품의 폐쇄성이 지닌 신화적 성격 또한 깨뜨려야 하고요. 

<칼 같은 글쓰기> 중에서




사실 그가 '페미니즘 작가'라는 인식을 준 것은 이미 <얼어붙은 여자>부터였다. 이 작품에서는 한 여자의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 그리고 결혼 생활까지를 그리고 있다. 마치 아니 에르노 판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작품이었다. 당시 시대상이 지금과 많이 다르고, 또 그나마 자유분방하다는 프랑스였음에도 여자로서 겪는 삶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추천할만한 책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남편과의 불화는 더 커진 듯하고, 이는 결국 이혼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더불어 <단순한 열정>, <탐닉>, <집착> 등 발표하는 작품들이 논란을 야기하면서 평론가들의 비판과 대중으로부터 야유도 많이 받았다. 이는 내가 앞서 느꼈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여성으로서 느끼는 욕망, 감정들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에는 아직도 무리였던 것은 아닐까. 그 '단순한 열정'마저도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주의 작가', '페미니즘 작가'라는 것에 대해 아니 에르노는 <칼 같은 글쓰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선 내게 페미니즘은 말(言)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그것은 경험한 어떤 육체, 어떤 목소리, 어떤 담론, 어떤 사는 방식들로서 존재했지요. 바로 내 어머니의 것들이죠. 읽고 싶은 것을 원하는 만큼 읽을 수 있는 자유, 여성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일들의 전적인 부재, 바느질과 요리에 소질 없는 것, 여성의 학업과 물질적 독립의 중요성 등, 난 <얼어붙은 여자>에서 이 모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

어떤 의미에서는, 어머니가 제공하는 삶의 모델과 보부아의 텍스트가 하나로 모여 내 내면에 어떤 살아 있는 페미니즘의 뿌리를 내렸던 것 같아요. 나의 페미니즘은 아직 관념화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내가 비밀리에 불법 낙태 시술을 받아야 했던 그 조건들로 인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예를 들어, '단어를 사물처럼' 다루고 논평 없이 사실에 근거하는 구체적 언어와 피지배 사회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내 글쓰기에 담긴 어떤 격렬함은 페미니즘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이유로 <단순한 열정>이 반(反) 감정소설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칼 같은 글쓰기> 중에서


즉,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삶이 갖는 부당함에 맞서기로 한 것이다. 글쓰기와 더불어 여성운동에도 참여함으로써 단지 말뿐이 아닌 실천으로서 보여주기도 했었다.


아니 에르노가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뒤바뀐 듯한 성향도 영향을 주었다. 여성적인 아버지와 남성적인 어머니는 전통적인 성역할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을 것이다.


또한, 작가를 남성 혹은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한 거부감을 표현하고 있다. 본인이 쓴 글들이 여성의 삶을 주로 이야기한 것이지만 그것을 '여성적 작가의 작품' 혹은 '여성주의 작품'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나탈리 사로트만큼이나 나 역시 '여성적 글쓰기'의 테두리 안에서 내 이름이 오르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남성적 글쓰기'라 이름 지어진 분류, 즉 생물학적 성이나 남성적 스타일이 결부된 분류는 없잖아요. 여성적 글쓰기란 여성을 위한 여성문학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상 창작과 수용 양면에서 성의 차이를 어떤 근본적 결정요소로 취급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그 성 차이는 유독 여성들에게만 해당되죠. 

<칼 같은 글쓰기> 중에서

 

이와 더불어 그는 좌파 성향의 작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노동, 환경 문제와 억압과 차별에 대해서도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특히 문학작품이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카사노바 호텔> 중에서 '문학과 정치'라는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글쓰기의 실천과 세상의 불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나는 그걸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고, 문학이 방식은 달라도 정치 행위와 마찬가지로 사회 변화를 촉발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 덕분에 전쟁이 멎거나 실업자가 일자리를 구하거나 라 쿠르뇌브의 아이들이 뇌이의 아이들처럼 활짝 열린 미래를 누릴 수는 없는데, 문학이 즉각적 효력을 발휘하는 법은 결코 없다.

장기적으로, 문학은 독자의 상상력에 스며들어 독자가 모르고 있던 현실에 눈뜨게 하거나 늘 같은 각도에서 바라보던 것을 다르게 보도록 이끌 수 있다. 독자가 전에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하게(우선은 스스로에게 하게) 해줄 수 있다. 문학은 초기 단계, 그러니까 내밀한 독서의 단계에서는 느리게 말없이 진행되는 혁명이다. 

가끔은 문학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혁명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혁명과 뒤섞이지는 않고 혁명을 넘어선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쇠사슬에 묶여 살아가고 있다." 루소의 이 문장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뜨겁게 타오른다. 극도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분리해낼 수 없이 한 덩어리가 된 문장. 문학적으로 보이지 않으나 어쨌든 문학 최고의 포부를 담아낸 문장. 그 포부란, 세상을 말하고 변화시키려는 욕망을 위해 예술이 가진 능력을 총동원하기. 

<카사노바 호텔> - '문학과 정치' 중에서


하지만 어찌 보면 그는 급진 좌파 성향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수의 작품에서 그는 프랑스 공산당을 옹호하거나 혹은 구 소련, 통일 전 동독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그의 성향의 일부분일 뿐, 그것을 전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오히려 극좌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만이 아닙니다. 사실 나는 한 정당의 구성원으로서 정치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집단 탄원서에 서명하고 행동에 가담함으로써, 예컨대 불법 이민자 후원을 비롯한 각종 비정규직 노동자 신분 합법화를 위한 여러 정치적 투쟁을 지지했으며 여전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칼 같은 글쓰기> 중에서





이처럼 그의 작품들을 다 읽고 나니 아니 에르노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유인 "사적인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와 임상적 예리함을 통해 탐구한 작가"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특히 <세월>은 그의 삶을 관통했던 여러 주제들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갔는데, 특이하게도 이 작품에서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지 않고 '그녀' 또는 '우리들'이라는 주어로 썼다. 이는 그것이 비록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이고 (<얼어붙은 여자>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더 확장해서는 성별을 떠나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작품을 읽어서인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은 이 정도로 마무리한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세계에 대한 논문이나 평론을 쓰려는 것은 아니니까.


올해 나이 82세인 그는 지금도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그는 <진정한 장소>에서 이렇게 말한다. 글쓰기는 아니 에르노의 '진정한 장소'이다.


이제는 같은 구멍을 파고 있는 느낌이에요. 제 책들은 모두 다르지만 하나로 모으는 무엇인가가 있죠. 그것들을 모으는 것이 무엇인지, 제 책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제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에요. 책에 대해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언젠가 프라하에서 열린 컨퍼런스가 끝날 때 즈음에 저를 초대했던 문화 고문관의 발언에 놀란 적이 있어요. 그는 "그녀는 자신의 책에 대해 전혀 말할 줄 모르는군요"라고 말했죠. 분명 그의 말이 옳았을 거예요.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저에게는 어려워요. 특히 호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더 어렵죠.

글쓰기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조금 더 잘할 수 있어요. 만약 누군가가 저를 최후의 참호로 몬다면, 그래도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느끼는 곳은 역시 거기이니까. 저만의 진정한 장소이죠.

<진정한 장소> 중에서


p.s. 그의 작품 중에서 <다른 딸>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언니에게 가상의 편지 형식으로 적은 작품인데 다른 작품과는 달리 상당히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런 형식은 출판사의 제안으로 처음 써봤다고 한다. 또 한하나 특이했던 작품은 <사진의 용도>인데 이는 마크 마리와 공동작업으로 되어 있다. 그와 함께 관계를 가진 후에 찍은, 어질러진 장면들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설명, 그리고 당시에 유방암으로 치료를 받던 내용들이 함께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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