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문학의 범주에 드는 대부분의 작품을 읽지만 그중에서도 소설, 특히 단편소설을 더 좋아한다. 외국 작가들보다는 국내 작가들의 작품들을 더 좋아하는데, 이는 외국 작가들의 작품은 번역가의 역량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많고, 정서도 좀 차이가 있어서 그렇다.
사실 나는 사람 이름을 외우거나 인물 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에 좀 약한 편이다. 일상에서도 사람들의 이름을 잘 못 외우고, 약간의 안면 인식 장애도 있어서 사람 얼굴도 기억 못 하고 같은 사람 얼굴도 잘 구분을 못한다. 그래서 심지어 아는 사람도 의외의 시간/장소에서 만나게 되면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장편소설의 경우에는 초, 중반부까지는 그러한 인물들 이름과 관계를 파악하느라 애를 먹는다. 주인공과 중요한 인물들 위주로 읽어나가고, 기억이 안나는 인물은 다시 앞으로 가서 찾아보기도 한다. 그나마 스토리 파악이 용이한 작품은 좀 나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어려움을 좀 겪는다.
더욱이 외국 작품들의 경우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헷갈리고, 너무 많아서 내 한계에 이르기도 한다. 심지어 같은 사람의 이름이 성과 이름 각각으로 나오거나 혹은 별칭, 애칭으로 나오기도 한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서 다행이다. 우리나라도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길지는 않으니까.
그러다 보니 내가 가장 약한 분야가 고전문학이기도 하지만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것도 기회 되는 대로 계속 읽으려고 하지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울 따름이다.
단편소설의 경우에는 장편보다는 그러한 부담감이 좀 덜하고, 좀 더 집중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어떤 이는 "단편은 뭔가 얘기를 하다 말고 끊기는 느낌"이라 싫다고 하거나,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다"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건 작품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장편소설의 경우에도 서사가 길다 보니 본격적으로 사건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빌드업을 견디기 어려운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단편소설과 대비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너무 짧아도, 너무 길어도 이해가 어려운 것. 하지만 길어서 좋은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짧아서 좋은 이야기도 있다. 각 작품은 그것이 최적의 분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라고 말하면 나 자신이 좀 한심해 보일 수 있으니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대 보자.
소설은 영어 단어로는 'novel'이다. 이는 '새롭다'는 뜻의 라틴어 'novellu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novel은 엄밀하게는 장편소설을 의미한다. 중세 이탈리아에서는 같은 어원을 지닌 'novella'가 있었는데 이는 주로 짧은 이야기를 의미했다고 하니, 현재의 단편소설에 해당할 것이다. 즉, novellus에서 novella를 거쳐 novel로 바뀌는 과정에서 소설은 짧은 이야기들의 집합체인 장편소설로 변해간 것이다.
단편소설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short story'라고 한다. 어쩐지, novel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단어다. 우리말의 '장편'과 '단편' 간 차이에 비해 차별성이 도드라진다. 그만큼 외국에서는 서사문학에서 장편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에드거 앨런 포는 단편 소설에 대해 "앉은자리에서 30분에서 두 시간 동안에 읽을 수 있고 모든 세부사항을 통괄하는, 특이하거나 단일한 효과에만 국한되어 있는 설화의 일종"이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이렇듯 단편소설은 길이가 짧고 (단편도 엽편처럼 짧은 이야기부터 중편이 가까울 만큼 긴 작품도 있지만) 간결한 형식의 이야기다. 대체로 한 두 사건 정도로 전개되고, 등장 인물도 많지 않다. 물론 예외도 많다.
소설가들 중에는 장편을 주로 쓰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단편을 주로 쓰는 작가도 있다. (물론 단편, 장편 모두 잘 쓰는 작가도 많다) 어느 것이 더 우월한 능력인가는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데, 이는 장편과 단편 각각이 명백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장편은 망원경에 가깝고, 단편은 현미경에 가깝다고나 할까. 망원경처럼 멀리 있는 풍경을 내쪽으로 끌어당겨와 볼 수 있는 것이 장편이라면, 단편은 현미경처럼 자세히 관찰하듯 볼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단편소설을 'slice of life'라고 말했다. 삶의 일부를 얇게 저며낸 것이다. 누군가는 '찰나의 순간' 혹은 '결정적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단편소설은 시가 되려 한다'라고 했다.
작은 것에 대한 치밀한 관찰. 내면과 관계에 대한 고찰. 그리고 간혹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대담성과 실험성. 단편소설은 그 분량의 한계 때문에 압축성이 증가한다. 시만큼은 아니지만 그 압축성 속에서 긴장감이 올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단편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이러한 것이 장편소설 내에서 발현된다면 아마 극심한 피로도가 느껴지겠지만, 단편소설은 그러한 한계에 다다르기 이전에 마치 자이로드롭이 떨어지듯 탁 떨어진다. 어쩌면 그 쾌감이 중독을 일으키는 것일지도.
신형철 평론가는 작가들을 '가진 작가'와 '안 가진 작가'로 구분했다. (정확히 기억이 안 나서 책을 찾아봐야겠지만 그런 뉘앙스였다) '가진 작가'는 그 작가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가진 작가이며, 그 작가 자체로 규정될 수 있는 작가다. 여기서 '아우라'라는 단어도 내가 임의로 쓴 단어지만, 그 작가가 가진 문체, 미장센, 주제의식 등을 아우르는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이 단어를 가져왔다. 단순히 '개성'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안 가진 작가'는 다방면의 작품을 두루 잘 쓸 수 있는 작가다. 달리 말하면 다재다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이 구분이 상반되는 것이라거나 혹은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비교 우위를 논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또한 어떤 작가를 어떤 구분으로 넣는 것도 너무 인위적일 것이다. 이는 장편이나 단편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단편에 더 적절한 구분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아서 그들의 책은 예전에 나온 것도 찾아서 읽어보거나 혹은 신간이 나오면 웬만하면 읽어보는 편이다. 여러 작품을 읽다 보면 그 작가의 작품 세게에 대해 좀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의외성을 느끼게 되는 편이기도 하다. 내가 선호하는 작가는 대체로 '가진 작가'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 새로운 작품들이 발표되며 새로운 작가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축복과 같은 것이다. 문학이 죽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문학이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시와 단편소설이 아닐까 싶다. 태초에 문학의 시작이 그것들이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