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의 걷는 속도는 느립니다.

[대만, 소소한 일상] 타국보다 ‘느림’, 여유와 타인 배려의 반증

by KHGXING

출근하다 보면 옆 사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때가 있습니다. 집에서 나와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다 보면 그러기도 하고, 지하철역에서 승강장으로 가는 길에도 그렇습니다. 역을 나와 사무실 건물까지 부지런히 걸어가면서도 그러합니다.


대부분 제가 앞서갑니다. 뒤서거니 하는 경우는 드물죠. 제가 걸음이 빠른 편이거든요. 거기다 대만 사람들의 걷는 속도가 느린 편인 데에도 원인이 있을 성 싶습니다. 대만인들도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출근길에 분주합니다만 ‘정신없는’ 분주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소 천천히 걸어가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좀 차분합니다.


나라별 걷는 속도라니 너무 주관적인 평가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여실히 느껴지는 것은 건널목 신호등 앞에서입니다.


직장인들에게 점심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 가운데 하나겠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식당에 가서 맛난 것 먹고 싶습니다. 타이베이 101 빌딩 옆의 사무실에서 나와 여러 식당이 모여 있는 우싱제(吳興街) 골목으로 가기 위해서는 8차선 왕복대로 건널목을 대각선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여기 신호등은 파란색이 몇 초 남았는지 알려줍니다. 건널목에 당도하기 전에 파란불로 바뀌면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하죠. ‘건널목에 도착하면 10초 정도 남을 것 같은데 그럼 건너가긴 무리고, 지금 뛰기 시작하면 얼추 건너갈 수 있겠는데, 뛰어 말아?’


이런 계산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면 저와 한국인 동료들은 십중팔구 뛰기 시작하거나 빠르게 걸어갑니다. 신기합니다. 이렇게 빠르게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에요. 대만인들은, 뛰거나 빠르게 걸어가지 않는 이상 건너갈 수 없으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도 건너지 않고 다음 신호를 기다립니다. 물론 다 그런다는 것은 아니고요. 제 경험칙 상 상당부분 그러하다는 얘기입니다.


대만에 와서 이게 참 궁금했습니다. 가볍게 뛰거나 빠르게 걸어가면 건너갈 수 있는데 대만 사람들은 왜 그러지 않을까요? 대만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굳이 빨리 갈 필요 있나, 그냥 다음 신호에 가면 되지 라는 반응입니다. 안전도 중요해라고 하기도 하고요.


허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후라 생각 되요. 여름이 6개월 이상 되고 그 여름의 한낮 더위에는 조금만 빨리 걸어도 땀이 송송 맺힙니다. 그러다 보니 빨리 걷기 보다는 천천히 걷고, 건널목에서도 굳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무리해서 건너가기 보다는 다음 신호를 기다리죠. 이렇게 생각하면 동남아에서 살아보진 않았지만 그곳 사람들은 더욱 천천히 걷지 않을까 싶네요.


대만 사람들의 걷기 속도를 일본과 비교해 보니 더욱 느리게 느껴집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일본 오사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어휴 일본 사람들 머가 그리 바쁘고 분주하든지요. 번화가이긴 하지만 우메다 지역에서는 출근 시간이건 낮 시간이건 퇴근 시간이건 저녁 시간이건 상관없습니다. 빠릅니다. 평소 제 걸음을 생각하더라도 일본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빠르게 느껴집니다. 대만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워낙 빠르다 보니 다소 거칠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글쎄요. 대만에서 3년 살고 있다 보니 더 그런 걸까요. 속도가 다르다 보니 부딪칠 수 있겠다 싶은 상황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마주보고 걸어오거나 건널목을 건너다보면 저 사람들은 평소 자기들의 속도와 다른 사람이 앞에 있다 보니, 예측을 벗어나다 보니 어깨를 부딪치거나 재빠르게 피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하네요.


나중에 들어보니 오사카가 일본에서도 심한 동네라 하더군요. 공항에서 만난 일본인 승무원이 그리 얘기합니다. 도쿄보다도 오사카 사람들이 조금은 거칠다고요. 일본어를 전공한 회사 동기도 같은 말입니다. 오사카가 일본에서 제일 분주한 지역 중 하나라고요.


어쩌면 제가 지금 다리를 다쳐서 걷는 속도가 한없이 느려지다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테니스 레그로 종아리 근육이 약간 찢어졌습니다. 절뚝이며 걷다 보니 평소 5분 거리가 15분 걸립니다. 많은 인파 속에서 걷는 속도가 느리다보니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럼 타이베이에서도 제 걷는 속도가 느려진다면 대만 사람들 걷는 속도는 엄청 빠르게 느껴질까요? 여행에서 돌아와 출근하며 유심히 관찰해 봅니다. 물론 다리가 불편한 저보다야 대만 사람들 걷는 속도가 많이 빠릅니다. 그럼에도 대만 사람들의 걷기는 일본 사람보다 많이 여유 있습니다. 느립니다.


궁금하더라고요. 나라별 걷기 속도를 연구한 논문이 있으면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논문이 있네요! 로버트 레빈(Robert V. Levine) 교수와 아라 노렌자얀(Ara Norenzayan)이란 교수가 공동으로 연구한 ‘31개국의 삶의 속도’(THE PACE OF LIFE IN 31 COUNTRIES)란 논문입니다. 재밌는 논문이네요.


저자들은 ‘삶의 속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어요. ‘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일상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평균적인 속도로, 그 사회가 시간에 부여하는 가치와 시간 압박의 정도를 반영하는 사회적 특성’이라고 말입니다.


그 삶의 속도를 측정하기 위한 관찰 가능한 지표로 3가지를 제시했습니다. 보행 속도, 우체국의 우편업무 처리 속도, 은행에 있는 시계의 정확성, 즉 표준시간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등입니다. 한 사회의 속도를 판단하기 위해 이 세 가지를 활용했다는 것이 타당한가 싶긴 한데 하여간 이 지표들을 표준화해서 종합적인 삶의 속도 지수를 산출했습니다.


혹시 있을까 해서 찾아봤는데 정말 이런 논문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그리고 대만과 일본의 비교에서 느꼈던 제 경험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더욱 놀라웠습니다.


제가 관심을 두었던 걷기 속도에서 일본은 전체 31개 국가 가운데 4번째였습니다. 대만은 18번째였고요. 일본과 대만의 보행 속도 차이 많이 나지요? 다만 대만의 속도가 준거 국가 가운데 중간은 간다는 게 신기하네요. 우편처리속도와 시계의 정확성까지 합친 전체 삶의 속도 측면에서도 일본은 4번째, 대만은 14번째입니다.


논문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삶의 속도 차이를 낳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저자들은 3가지를 꼽았습니다. 경제적 활력, 기후, 문화적 가치입니다. 즉 경제생산성이 높을수록, 추운 지역일수록, 개인주의 문화일수록 삶의 속도가 빠르다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속도가 빠를수록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관상동맥심장질환에 의한 사망률이 높고 흡연율이 높답니다. 스트레스가 아무래도 더 심해서겠지요? 다만 의아한 결과가 있습니다. 삶의 속도가 빠를수록 주관적 행복감(Subjective Well-Being, SWB)이 높다는 거에요. 일반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여유 있는 느림이 더 행복한 것 아닌가 싶은데 그 반대네요.


이 논문에서 얘기하는 SWB에 대해서는 유의 깊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여기서의 행복은 객관적 삶의 질이 아니라 주관적인 평가라는 점입니다. 개인들이 ‘자신의 삶이 얼마나 잘 굴러가고 있다고 느끼는가’를 의미하는 것인데요. 일종의 경제적 성취에 대한 행복이라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는 자아존중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감정을 행복으로 표현한 거라 생각합니다. 삶에 여유가 있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스트레스가 낮은 점은 반영이 되지 않은 것이죠.


한 가지 이 논문에 감정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의 삶의 속도를 18번째로 평가했다는 점이에요. 걷기 속도도 대만보다 느린 20번째입니다. 측정 결과에 다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현실과 비교하며 읽는 맛이 있었습니다.


타이베이 야경.jpg
가오슝 야경.jpg
타이베이와 가오슝 야경


다시 대만 사회의 걷기 속도로 돌아와 볼까요. 제 경험칙 상 대만 사회의 걷기 속도는 앞서 얘기한 대로 느립니다. 느리고 빠르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니까 여기서는 일본과 한국 사회와 비교한 속도입니다. 그 느림을, 앞선 논문의 SWB에서는 포착하지 못하는 삶의 여유, 관계에서의 만족, 일상의 평온함 측면에서 해석해 볼까 합니다.


대만에서 생활하며 대만인들의 걷기 속도, 삶의 속도가 느리다 여겼던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 때문이죠. 대만은 소수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일본이나 한국보다도 남다릅니다.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게 사회 속도를 늦추기도 하는데 대만 사회 구성원들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몇 가지 예만 간단히 언급하면 이러합니다.


지하철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 탑승하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먼저 손을 내밀어 우대좌석으로 안내합니다. 건물로 들어서는 시각 장애인이 있으면 건물 경비원분이 서둘러 손을 빌려줍니다.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해서 가고자 하는 층 버튼을 눌러줍니다. 해당 층에 당도하면 엘리베이터 안에 함께 탑승했던 사람들이 알려줍니다. 도착했다고.


버스에 휠체어 승객이 탑승하려 하면 기사분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도와줍니다. 버스 안의 탑승객 중에 시간이 늦어진다고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인도와 차도가 이어지는 가로변은 비스듬하게 처리돼 있습니다. 자전거 이동의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만 보행자 편의도 함께 도모한 것이죠. 다리가 한동안 불편했던 저로서는 이 조그마한 차이가 꽤 고마웠습니다. 이런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동성애를 아시아에서 최초로 합법화한 동력이었을 겁니다.


사회의 물리적 기반시설은 낡고 둔탁하고 오래됐지만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마음은 언제나 푸르다 표현하면 너무 감성적일까요. 대만에서 유학하는 학생들 가운데는 이러한 대만 사회 속도, 분위기, 경쟁에 치이지 않는 태도 등이 좋아서 눌러 앉는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하네요.


물론 이러한 사회 속도, 분위기에도 단점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대만의 속도에 제가 녹아들어갔나 봅니다. 이게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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