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관광 22개 장면 중 두 번째] 중국의 방북 단체관광 시작
북한관광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몇 가지를 꼽으라 하면 나는 주저 없이 2010년 4월 12일 평양 순안공항을 얘기하곤 한다. 특히 외래관광 역사에서 꼽으라면 말이다.
이날 꽤 많은 비가 왔다. 중국 언론에선 ‘큰 비가 내렸다(大雨)’고 표현할 정도였다. 하지만 공항에는 도착한 사람들과 환영하는 인파들로 북적였다. 우산을 쓰고 환영행사를 개최했지만 만면에 웃음기 가득했다.
순안공항에 도착한 사람들은 중국 국가여유국(현 문화관광부) 주산중(祝善忠) 부국장을 단장으로 한 20명의 중국 방북 관광단. 이들을 맞이한 북측 인사들은 국가관광총국 강철수 부총국장 일행이었다. 강철수 부총국장의 안내로 화동 2명이 주산중 부국장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짙은 감색 또는 검은색 양복과 넥타이 차림의 성인 남성들 사이에, 머리를 길게 땋아 머리핀을 단정하게 꽂은 화동 두 아이의 노란색, 빨간색 옷 색깔이 눈에 띈다.
기념비적인 날이니 단체기념사진을 빼놓을 수 없다. 공항 건물에 걸린 ‘중국 관광부문 방문단의 우리나라 방문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란 현수막을 배경으로 함께 찍었다. 이날 공항으로 들어온 중국 단체는 20명이라 했으나 사진 속 인원은 그보다 많다. 여행사 직원도 있을 게고 환영 인사들도 섞여 있을 게다. 4월이긴 하지만 아직 입고 있는 옷들이 두툼하다. 평양의 4월은 7도에서 17도 사이이고 평균 12도이니 그럴 수 있겠다.
어르신들이다. 사진 속 사람들의 평균 연령대는 아무리 봐도 중장년층 이상이다. 외모로 사람 나이 속단할 수 없음은 경험치상 맞긴 하지만, 사진 속에 30대도 있어 보이지만, 대다수는 그 이상으로 보인다. 2024년 2월 9일 평양 순안공항을 배경으로 찍은 단체사진에 등장하는 러시아 관광단체보다는 확실히 연령대가 높다.
중국 언론들도 중년층과 노년층이 상당수라 보도했다. 실제 광둥성 지역 참가자들의 연령대는 26~69세였고 대부분은 40대와 50대였다. 광둥 지역 단체는 여러 여행사가 연합해서 모객 했는데 난후국제여행사(南湖國旅)가 모객한 관광객의 평균 연령은 51세였고, 최연장자는 71세였다. 이렇게 연령대가 높은 데는 북한의 ‘오늘’을 통해 중국의 ‘과거’를 회상하고 느끼려는 여행목적에 있을 듯싶다. 아울러 북한과의 특수한 관계에 기인하는 향수, 북한이라는 ‘신비한’ 국가에 대한 호기심 등도 작용했을 법하다.
12일 단체는 이렇게 항공편을 이용해 북한에 당도했지만 기차를 이용해 13일부터 방북하는 인원이 주력이다. 출발지역은 각양각색이다. 모두 10개 지역. 베이징 200명, 텐진 20명, 상하이 20명, 랴오닝성 30명, 지린성 30명, 헤이룽장성 20명, 허베이성 20명, 산둥성 20명, 장쑤성 20명, 광둥성 20명 등이 18개 소그룹으로 북한을 찾았다. 총 모객인원은 400명이지만 실제 방북에 나선 인원은 395명. 첫 단체이니만큼 민간 모객도 모객이지만 중국 정부에서 직접 챙겼다. 중앙과 지방정부 공무원들과 여행사 직원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일종의 팸투어인 셈이다. 게다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 노병 24명도 함께 했다. 이번을 기화로 북중간의 우호 분위기 조성에 진력을 다하려 했다는 느낌이다.
북한은 여러모로 이 첫 번째 방북관광단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김도준 국가관광총국장이 4월 15일 양각도국제호텔에서 직접 환영만찬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류홍차이(刘洪才) 북한 주재 중국대사도 참석했다. 북한 언론은 이번 단체의 방북관광을 상세히 보도해서 의미를 부각했다.
이들 단체가 들른 북한 관광지 또는 콘텐츠는 김일성 생가, 김일성화 축전장, 개선문, 당창건기념탑, 남포 서해갑문, 홍루몽 공연 등이다. 물론 중국인의 북한 방문시 필수 방문코스인 북중우의탑도 당연히 들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을 기린다는 명목 하에 만들어진 이 우의탑은 양국 친선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9년 북한을 방문할 때도 이곳은 일정에 있었다.
장면 설명이 길었다. 이게 왜 북한 외래관광에서 중요한 상징적인 장면인가? 일반 단체관광객의 해외여행 모습 아닌가? 그게 그렇지가 않다. 북한 외래관광에 있어 터닝포인트인 이유는 중국 언론보도를 통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중국 언론은 “중국 공민 단체의 방북관광이 정식 시작됐다”(남방주말, 南方周末), “방북 단체관광의 서막이 열렸다.”(환구시보, 环球时报) “이전 변경관광이라는 형태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북한관광이 드디어 일반 단체관광 형태로 가능해졌다”, “북한관광의 일상화와 대규모화가 가능해졌다”(광저우일보, 广州日报)는 등 다양한 각도에서 그 의미를 분석했다.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자국민의 해외여행을 어떠한 프로세스로 승인하는지 그 절차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개인의 해외여행에 대한 통제가 가능한 사회주의국가라 가능한 모델이긴 한데 중국은 자국 단체관광객이 갈 수 있는 해외여행 목적지를 지정하고 있다. 이를 ADS(Approved Destination Status, 被批准的旅游目的地国家)라 칭한다. ‘해외여행목적지로 비준 받은 국가’라 할 수 있다.
이 제도가 시작된 지는 꽤 오래됐다. 1983년 홍콩과 마카오를 처음으로 ADS 대상국으로 지정했다. 이어 1988년 태국, 1990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1992년 필리핀에 이어 1998년 우리나라가 7번째로 ADS 대상국이 되었다. 2024년 현재 총 138개 국가를 ADS대상국으로 지정했다.
2010년 4월 12일 중국의 방북단체관광객은 북한이 중국과 바로 이 ADS 협정을 체결한 후 받은 첫 번째 관광단체였다. 그래서 그 의미가 남다른 것이다. 물론 오해해선 안되는 것이 있다. 중국인의 북한관광은 2010년 이전에도 이뤄지긴 했다는 점이다. 다만 그 형태는 변경관광이라는 형태나 북측이 초청하는 형태, 또는 대표단 방문 형식 등으로만 진행되었다. 여행사가 자유롭게 모객해 북한을 여행하는 순전한 의미와 관광형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공식적으로 북한을 단체관광목적지로 지정하였기에 변경관광이라는 다소는 ‘변칙적인’ 형태가 아니라 공식적인 관광이 시작되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제 북한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외관광객 송출국인 중국의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관관산업은 북한 상황에서 투자 대비 수입이 어느 산업보다 큰 부문이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관광객 송출국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관광을 통한 외화수입 창출에 북한이 관심을 두지 않을 이유가 없다.
중국 해외관광객의 ‘파워’는 물량과 소비액에서 나온다. 중국 단체관광객을 받을 경우 발생하는 부작용도 있으나 그 파워를 생각할 때 많은 국가에서 중국과 ADS협정을 체결해 중국단체관광객을 유치하려 하고 있다. 2017년 기준이긴 한데 중국 관광객이 자국 인바운드관광객 가운데 제일 많은 나라는 태국, 일본, 한국, 베트남, 북한 등을 포함해 10개국이었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도 중요한 인바운드국가로 자리매김했다.
ADS협정 체결효과는 비교적 뚜렷하다. 일례로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중국 전역의 방한관광이 허용된 2000년 중국의 방한객수 증가율은 전년 대비 39.8%로 전체 방한관광객 증가율 14.2%를 크게 상회했다. 물론 관광객이 증가하는 요인은 다양하지만 ADS 협정과 전면적인 방한관광 허용이 그 증가율에 영향을 미친 주요 요인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1998년부터 2003년 사이 중국과 ADS 협정을 체결한 17개국의 협정체결 전후 3개년의 중국 방문객 증가율을 비교한 어느 연구논문에 따르면 체결 이전 3개년보다 이후 3개년 동안의 중국 방문객 증가율이 높았다.
북한에 있어서도 이러한 효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 어느 국가보다도 효과는 극적이고 드라마틱했다. ADS협정에 따른 중국 단체관광객을 유치한 첫해인 2010년 전체 방북 중국관광객수는 13만1천명인데, 2009년도의 명확한 수치는 없으나 2009년보다는 대폭 증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듬해인 2011년의 방북 중국관광객은 19만4천명이었다. 이는 2010년보다 48% 급증한 것이다. 중국인의 전체 출국관광 증가율 22%보다 두 배 이상 상회한 수치다. 이 해 중국의 해외 각국 출국관광 증가율 중에서 3번째에 해당한다. ADS로 지정된 이후 북한 관광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리라. 중국에 있어 절대치로는 큰 수치는 아니지만 증가율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수치이고, 북한에 있어서는 절대치로도 큰 의미가 있는 규모다.
그럼 왜 2010년이었을까.
중국이 전세계 국제관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중국 단체관광객이 방문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인 ADS 협정체결은 상당수 국가들이 원하는 바다. 하지만 그 협정 체결은 중국 국민들이 해외관광을 희망하는 국가라는 차원에서만, 즉 순수하게 관광 측면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ADS 대상국 지정은 전적으로 중국 아웃바운드 시장의 요구에 따라서만 자연스럽게 생겨난다고 보는 것은 넌센스다. 정치적으로 중국과 우호관계가 있는지도 중요 고려 요소일 수밖에 없다. 중국 관광객들의 방문으로 관광수입 증대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중국은 ADS를 외교적으로 상대국에 주는 선물이라고 인식할 터이다. 일종의 ‘관광외교’인 셈이다.
여기서 잠시 북한과 중국간 ADS협정 체결 시점을 역산해서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흥미롭다. 중국 정부가 북한을 출경관광목적지국가로 정식 비준한 것은 2010년 2월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북한을 ADS 대상국으로 삼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것은 2008년 8월경이다. 그리고 양국간 ADS 협정을 체결한 것은 2009년이다.
그 협정 체결은 양국간 실무협의를 거쳐 2009년 10월 4일 이뤄졌다. 원자바오 중국 국무원 총리가 북중수교 60주년을 기념해 10월 4일부터 6일까지 북한을 공식 친선방문했는데 그 시점을 체결일로 선택했다. 협정 정식명칭은 ‘중국 관광단체의 북한 관광실현에 관한 양해문’’(中国旅游团队赴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旅游实施方案的谅解备忘录)이다. 협정 관련 양국 내부 절차가 마무리된 것이 2010년 2월이었다. 동시에 중국 중앙 정부는 2010년 1월 15일 각 성, 자치구, 직할시 여유국에 공문을 보내 북한을 ADS 대상국으로 결정하였고 북중 간의 양해문 체결에 따라 중국 단체관광객의 북한 관광이 이뤄질 것이라고 공식 전달했다.
2008년과 2010년 사이 북중 간에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분석보다는 해석과 상상의 비중이 더 큰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북핵실험에 대한 중국의 대응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북핵실험은 2006년에 1차, 2009년에 2차, 2013년에 3차, 2016년 4차와 5차, 2017년 6차가 진행됐다. 고위급 인사교류를 양국간 관계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로 볼 수 있다면 2차 핵실험과 여타 핵실험 간의 확연한 차이가 눈에 들어온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주변국의 ‘안정’을 중시하고 미중 관계 글로벌 전략의 일환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도광양회를 모토로 삼고 있던 중국으로서는 북한의 핵실험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1차는 물론 3차 이후 핵실험에서 양국간 고위급 방문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예상 범위 내의 현상이다.
하지만 2차 때인 2009년은 달랐다. 북중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중국 최고위층인 국무원 총리가 북한을 직접 방문했고 고위급 교류는 19회로 급증했다. 2006년 7회, 2014년~2016년 3회와 분명히 차이가 있다. 1차 핵실험 이후 급감했던 고위급 교류는 2007년에도 줄어들었다가 2008년 10회로 서서히 회복했고 막상 2차 핵실험이 있던 2019년에는 오히려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이를 이렇게 해석해 보면 어떨까.
북한의 첫 번째 핵실험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과 맞닥뜨려 중국도 당혹스러웠고 분노했을 듯싶다. 그러한 전략이 고위급 교류 감소로 표출됐다. 하지만 경색국면이 수년간 지속될 수는 없다. 특히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미중 갈등이 점차 표출되던 시점에는 더욱이 북한과의 관계회복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이 2008년부터 인사교류 회복으로 나타났고 2009년에는 2차 핵실험도 있었지만 중국은 오히려 북한 달래기를 통해 문제에 접근하려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제기되면서 북한 정권의 불안정은 영토와 국경 등 중국의 핵심이익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중국으로서는 북한의 안정을 위해 압박이 아닌 유화책으로 돌아섰다고 해석가능하다. 이러한 전략과 전술 속에서 북한에게 줄 당근이 필요했고 그것이 관광부문의 ADS 협정으로 이어졌으리라.
외래관광 부문에서의 당근이 북한으로서 더욱 달콤했을 이유가 2008년에 북한에도 있었다. 그해 남북관광이 중단됐다. 그간 193만명이 방문했던 금강산 관광이 그해 7월 11일 남측 관광객의 북측 총격피살사건으로 중단됐다. 북한의 주요 외화수입 창구 역할도 했던 남북관광이 중단된 지 2개월 만에 북중 간 ADS협정 논의가 시작된 셈이다. 북한으로서는 중국관광객 유치를 남북관광에 대한 일종의 대체재로 출구를 찾은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북한은 2001년에도 중국에 ADS 대상국 지정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북한으로서는 1998년 한중 양국이 ADS 협정을 체결하고 2000년 중국이 방한관광을 전면 개방한 데 대해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002년 아리랑 축전을 앞두고 관광 총력전을 펼치던 북한에게 ADS 협정 체결은 중요한 의미가 있을 시점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허용하지 않은 이유가 관광 인프라 미비에 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2000년 ADS 지위를 획득한 국가는 브루나이, 캄보디아, 일본, 미얀마, 베트남이고 2002년에는 이집트, 인도네시아, 몰타, 네팔, 터키 등이다. 관광측면만 비교한다면 이들 국가들이 모두 북한보다 월등히 나은 조건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중국으로서는 북한에 ADS를 허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치외교적 이점이 불허를 통한 갈등보다 크지 않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중국의 거부에 북한은 일부 북중관광 중단으로 응수했다.
아무튼 북한의 외래관광은 2010년대 소위 퀀텀점프를 했다. 2010년대말 북한을 찾은 중국관광객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또다른 주제로 다루겠지만 방북 중국인은 100만명을 넘어섰고 순수 관광목적 방문객도 30만명에 육박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계기를 만든 것이 바로 이 ADS 협정이었고 2010년 4월 12일 북한을 찾은 중국의 첫 번째 관광단체가 그 첫 포문을 열었다. 2010년 4월 12일 순안공항에서의 환영행사 장면을 북한 관광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장면이라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한의 2010년대 퀀텀점프의 시작을 알린 장면이었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