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희 Sep 04. 2020

서른 살 딸이 부모에게 건넨 편지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데, 편지야말로!

    

    이별의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편지를 써서 주고받는 게 우리 가족의 전통이 된 지 오래다.


    결혼한 딸이 전해왔다-사돈댁에선 그런 식의 주고받음 쑥스럽고 간지러운 일이라 하지 않는다고 하시더란다!^^ 그럼 알겠다고 했고,

서로에게 두고두고 힘이 되고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글은 우리끼리만 하는 걸로 한 모양이다. 공항에서 건네받은 서른 살 딸의 편지다.


           사랑하는 아빠 엄마

     봄이 봄처럼 여겨지지 않던 올해 5월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서 제 마음을 다독여주었던 건 엄마 아빠 모찌(얼굴 하얀 동생의 닉네임), 그리고  '이 아름다운 세상'(집 이름)에 대한 그리움이었어요.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던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의 길목에 서 있는 지금도 무엇 하나 애초의 계획대로 되어가는 게 없네요. 하지만 갑갑함과 폭풍 같은 계획의 차질이 날마다 공존하던 지난 몇 달 내내, 저는 두 분 곁에 머무르면서 다시금 단단해지고 한편으로는 더 유연한 마음가짐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 감사해요. 제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지, 그리고 앞으로도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까지, 새삼 헤아려보게 된 시간이에요.

     갑작스러운 저의 오랜 머무름과 코로나 19, 긴 장마에 두 분 참으로 당혹스러우셨을 텐데도 넓은 마음으로 너그러이 이 시기를 지나시는 모습 보면서 '아, 역시'라는 생각과 '나도 엄마 아빠처럼 그 어떤 변수에도 의연하고 즐거운 어른이 되어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이제 14시간 후면 저를 기다리고 있는 K.H를 만나 집에 도착할 거예요. 새로운 시작이 설레고, 그만큼 긴장도 돼요. 저의 여정에 아빠 엄마의 응원과 믿음 늘 함께 한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두 분과 모찌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자신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일 수 있도록 제대로 해 볼 참이에요! 기대해주쎄용.

     날이 갈수록 풍요로워지고, 멋스러워지는 두 분의 정원과 매일매일에 진심 어린 기도와 축복을 보내요. 생명력과 아름다움 가득한 '이 아름다운 세상'에 늘 깃들어 있는 조화로움을 사랑해요. 두 분을 닮은 모습이라 더욱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미국이 더 이상 예전처럼 머나먼 나라가 아니게 된 기술의 발전에 감사하며 페이스톡으로 자주 왕수다 타임 갖겠지만, 우리 스타일대로 보다 찐한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 몇 자 적어보았어요. 

     다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고, 산책하고, 드라이브하던 모든 시간에 힘입어 저는 또 다시! 엄마 아빠의 딸내미답게! 당당하고 기쁜 하루하루 보내다가 더 좋은 모습으로 돌아올게요. 도착하자마자 소식 전할게요.

    -아빠 엄마를 만나 행복한 지언 올림-

        
     9월 3일의 공항으로 가던 인천대교 위에서 우리는 공포로 잠시 얼어붙었다. 제주도에서 달리던 차가 폭풍에 뒤집혀버린 뉴스가 생각나서였다. 속도를 줄였고, 차는 휘청대며 공항에 도착했고, 모두가 마스크 일색인 곳에 잠시 머무르다 떠나왔다. 불과 하루도 되기 전 돌아온 산촌 집에는 햇볕이 쨍쨍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빨래는 뜨겁게 펄럭이고 있다.


 '오직 모를 뿐!'-쑹산 스님의 이 강연으로 출가한 하버드 학생들이 많았다더니, 지금이 바로 그 시대인 듯하다.

이전 15화 2020-작약과 모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