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 하던 그 아가들은 형제였고,

두 아이는 남매였다.

by 이경희


한 달에 한번 정도 베트남 빈증의 'Be Tho'

고아원을 방문할 때가 있었다. 중년을 넘긴 원장

수녀님은 당당하고 호방하신 동시에 진실하고

의지가 강한 분이셨다. 다른 고아원과는 달리

이곳은 미혼모와 신생아 정상아와 지체부자유아

120여 명이 뒤섞여 살고 있는 곳이었다. 어떤

아이는 내가 방문하면 나를 구석으로 불러 돈을

좀 달라고 하기도( 돈의 쓰임새는 모르는 듯!)

했다. 다른 구석에서는 말 못 하는 미혼모들이

자립을 위해 재봉틀로 제품을 만들었고 몇몇은

퀼트 이불을 만들기도 했다. 여하튼 갈 때마다

곳곳이 어수선해서 정신이 쏙 빠지는 경험을

했다.


나는 그들의 언어를 알지 못하고 그들은 아예

말을 할 수 없으니 정상아들이 학교를 가고 난

뒤 우리가 만날 때면 말이 필요 없었다. 아기들

이야 원래 말을 못 하니 그렇다 치고, 나 역시 숫제

침묵 속에서 조용히 가난한 공간을 서성거릴

때가 있었다. 벙어리 미혼모들은 임신한 채 남자

로부터 외면당하고 집을 나와 떠돌다 이곳으로

온 경우라고 했다. 여러 번의 만남으로 서로 익숙해

지면서 깊은 포옹을 하기도 하고 손을 잡고 쓸어

주기도 하며 가만히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뭐가

우스웠는지 빵 터지는 일도 더러 있었다. 자신

들이 만들고 있는 퀼트 제품을 보며 내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거나 너는 참 예쁘다는 표현을

하면 슬픈 마음에도 미소를 보여줬다.


근무하던 회사에서는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시작

한 일이었고 의식주 중에서 먹는 것이 중요한 만큼

매달 쌀을 지원했다. 처음 몇 년은 매달 필요한 양

의 절반을 보내주고 내가 그곳을 떠날 즈음엔 120

명이 먹을 수 있는 쌀 전체를 다 지원하기로 했다

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어느 해 성탄에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으냐는 의견

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만장일치 품목이 '신발'

이었다. 신앙심 깊은 오피스 매니저 '홍'이 치수와

개인의 선호도를 조사하여 각양각색의 신발과

멋쟁이 벨트를 주문해주었다.


신발과 벨트 등을 펼쳐두고 각자 호명하면 받아

가는 게 그날의 일정이었다. 외국인인 나를 위하여

몇몇 아이들은 나도 모르는 한국 걸그룹의 댄스를

췄다(어안이 벙벙하고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신발을 나누던 중 3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자기

신발을 받더니 같은 한 켤레의 신발을 더 집어

다른 누군가에게로 갔다. 나는 그 아기의 행동을

이해 못하는 상황이었다. 주위의 아이들은 내가

어릴 적 설빔으로 신발을 받을 때 저랬었나 싶을

만큼 즐거운 축제 분위기였다. 근사한 신발과

벨트가 생긴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은 거울로

달려가 이리저리 제 모습들을 비춰도 보고 서로를

툭툭 치며 좋아라 했다.


그런데 한구석에서 아까 그 꼬맹이 아기가

누군가를 바닥에 앉혀놓고 아주 힘겹게 샌들을

신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똑같은

일란성쌍둥이였다. 어떤 사연으로 함께 고아원

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말은

못하지만 서로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 아이들이 형제임을 알게 됐다.

다른 경우도 있었다. 평소 방문에서는 거의

만나지 못했던 고등학생 누나와 예의 바르고

호감 가던 초등학교 4학년쯤으로 보이던 아이가

남매인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누나는 동생을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엄마처럼 신발을 신겨

주고 있었다. 만족한 건지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비 내리는 가을

밤! 신발 한 켤레 허리띠 하나로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하던 그들의 웃음이 떠오르는 이유는

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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