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요즘 볼만한 영화가 많지 않다. 영화를 보면 첫 시작 인트로의 임팩트가 전체 영화의 흐름을 좌우한다. 소설은 내겐 다름 느낌이다. 사실 자주 본다고 할 수가 없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고구려, 계속 나오는 담덕, 사람을 지루하고 답답하게 하는 가끔 야속한 김훈의 소설이 최근에 본 것 같다. 읽으며 상상해 보는 것이 너무 잘 맞으면 흥미가 떨어지기 때문일까? 가끔 도전하는 세계문학이란 것도 수준이 일천해서 인지.. 이 책을 보고 나면 읽다가 덮어두었던 윌든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이 책은 오래전 무슨 내용일까? 호기심이 잠시 있었다. 그리고 바쁜 일상 속에 10년이 넘게 지났다.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밋밋한 그림을 설명하는 것처럼, 건조한 글 속에서 아주 입체적인 실루엣을 담아낸 첫 단락을 여러 번 읽게 된다. 공기 속 보이지 않은 물방울들이 세상의 보석처럼 터져 나오듯, 다양한 형상의 인간 속에 침전된 진실과 양심이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듯한 순간처럼 다가온다.
어린 시절 길이 막히고 요란한 뉴스를 이야기하던 늦은 밤 어른들의 이야기, 전국체전인지 불타오르는 도시 이것이 광주가 아닌 주변 도시에서 들을 수 있는 전부 거나 전쟁이 났다는 풍문정도가 아닐까? 뻐거머리가 온다고 전교생이 북한처럼 도로에 나가 태극기를 흔들고, 텔레비전에서 보던 사람을 봤다는 기억정도에서 내겐 단절이 된다. 그러다 청문회에서 뻐거머리에게 명패를 던지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10년의 시간이 흐르고, 대학시절 참상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곳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분노했던 시간의 공백은 길기도 하다. 누군가에겐 잊히고, 누군가에겐 두려움과 공포로 움츠려 들고, 누군가는 존재의 상실을 남긴 것이다. 또 누군가는 열심히 지우고 가리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더욱 분주한 나날이 아니었을까?
그 일을 만든 사람들이 권력을 획득하고 사라지고 기득권으로 아직도 존재한다. 세상을 보는 간단한 기준인 권력과 부로만 볼 수도 없고, 그런 접근으로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인간에게 각인된 것들은 두고두고 세상에 남기 때문이다. 아프지만 그것이 이 땅의 문명이 남긴 하나의 자국이다.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아무도 모르게 새벽처럼 다가온 참상,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국가라는 존재가 백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만행, 이런 일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믿고 맡기고 믿음대로 해야 하지만 사람이란 존재가 문제를 만든다. 민주주의가 허술하지만 그렇다고 더 좋은 제도를 만들기 쉽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반대와 거부가 많은 것은 아닐까? 세상은 그렇게 지옥이 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언젠가는 끝가지 희망을 놓지 않으며 진실과 양심을 되살린다는 것이다. 죽어 본 적도 없고, 지옥에 가본 적도 없다. 하지만 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핏빛 한이 터져 오르는 것만으로도 지옥이 지나갔음을 짐작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과정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80년 광주와 30년이 넘은 시간 속에 한과 양심을 품고 살아온 이야기를 다양한 시선으로 풀어주고 있다. 그보단 그 다양한 시선을 하나의 사건과 말로 형용하기 힘든 무엇으로 꿰어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무겁고 또 한 편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구나 감사하게 된다. 그 시대와 현장을 건너온 사람들이 잊히지 않고, 또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무가 이 땅의 양심이 아닐까 한다.
이런 진실과 양심에 지탄을 가하는 것이 곧 지옥을 만든 사람과 동업자 거나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런 자들이 역적과 무엇이 다른가? 아주 오래전 보았던 '꽃잎', '화려한 휴가' 같은 영화들이 떠오른다. 용서하는 것은 큰 용기를 요구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흉악한 사건을 일으킨 위정자들은 용서의 그늘에 들기까지 아주 엄격해야 한다. 역적을 공소시효 없이 멸해야 한다고 생각하듯, 사람의 생명과 안위를 위협하는 자들을 나는 이 땅의 국민이라고 해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사람을 배신하고 속이고 죽이는 자들에게 양심을 기대하긴 참 요원한 일이다. 저승이 있다면 전부 지옥행 Fast-track을 태워도 시원치 않으나 인간은 또 확인하고 확인하고 더디다. 이것 또한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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