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고양시의 경계에 있는 북한산은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대한민국 오악(五嶽)이라 불린다고 한다. 북한산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데 백운대(836.5미터), 인수봉(810.5미터), 만경대(787미터)가 큰 삼각형으로 놓여 있어 삼각산(三角山), 화산(華山)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려 시대부터 삼각산이라고 하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북한산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23살에 대학에 간 나는 산이 좋아 산악 동아리에 들었었다. 그때 우리 동기들도 늦게 입학한 터라 다 나이가 비슷했다. 그중에서 제일 친했던 동기들과 산악 동아리에 들었었다. 주말이면 북한산에서 야영하기도 하고, 그냥 산을 오르기도 했었다. 야영하는 날에는 배낭 가득 텐트랑 먹거리를 넣어서 무거웠다. 배낭 무게에 쏠려 휘청거리기라도 하면 뒤로 넘어갈 것 같았었다. 산에 대한 즐거움 때문에 그 무게도 견딜 수 있었는데 선배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
21살인 선배에게 된통 잔소리를 듣고 나서 탈퇴를 했었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입학했으니 학교만 다니는, 나이 어린 선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텃세를 부린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만 한참 청춘의 피가 온몸을 감쌌던 그때는 선배의 말조차도 집어삼켰었다.
그 후 나는 졸업과 동시에 남쪽으로 이사해서 오래도록 북한산에 오르지 못했었다.
금요일만 쉬어서 금요일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다. 늦잠을 자거나 소소한 일들로 시간을 쓰면 '낭비'했다는 생각에 괴롭기까지 했다. 그건 학원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쉬는 날 없이 일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만은 절대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놓고도 학생들 보강을 하거나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에 과부하가 걸려 귀차니즘에 빠졌고, 일하는 게 즐겁지 않았다.
기차표를 끊어놓고 며칠 간은 흥분되어 일이 즐거웠다. 문제는 하루 쉬는데도 정리할 게 많았다. 우선 1달에 한 번 취재 글을 쓰는데 그게 마감일이 다가와서 글을 마무리해야 했다. 다음 달 학원 교재도 신청해야 했고, 학부모에게 전화할 것도 챙겨야 했다. 하나하나 챙기다 보니 떠나는 게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코레일 사이트에 들어가서 몇 번이나 기차표를 취소할 생각까지 했다. 서울까지 가는 시간, 산에 오르는 시간, 다시 장성으로 돌아올 시간을 계산했더니 하루를 꼬박 다 써야 했다. 또 대학 생활을 하는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엄마가 집을 비우려니 그것도 걸렸다.
마음이 약해졌지만 무조건 이기적으로 되기로 했다. 그래서 늦게 퇴근해서 깍두기를 담그고 겉절이를 무쳤다. 시래기를 삶아 된장국을 끓이고 아이가 좋아하는 고기와 생선을 샀다. 하루 집을 비우는데 준비하고 났더니 새벽 1시, 미리 원고를 보내놓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글을 퇴고해서 메일을 보냈더니 2시, 이것저것 점검하는데 3시. 6시 29분 기차를 타려면 최소 새벽 5시에는 일어나야 해서 잠을 자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씻으니 기차 탈 시간이었다. 기차를 타고 난 뒤에야 비로서 내 행동에 웃음이 났다. 고작 하루 나가면서 이것저것 챙기는 걸 보니 엄마로서 주부로서 역할을 다 한 것 같은데 살짝 헛웃음이 났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여자가 혼자서 어떻게 산에 가세요?”
“저는 무서워서 못가요. 우리 남편은 절대 저를 혼자 가게 내버려 두지 않아요.”
귓속을 파고드는 파리의 날갯짓 같은 소리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무시하면 그만인데도 산에 오를 때면 눈치가 보인다. 어쩌면 주부의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한테 나는 그래도 할 일은 다 하고 간다라는 걸 증명하려 애써 늦은 시간까지 반찬 만들기에 열중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 산에 갈 시간에 소설이라 써라, 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산에 갈 때면 SNS에 열심히 글 쓴다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직무 유기를 한 사람처럼 말하는 그들보다는 더 열심히 쓰는 것 같은데 성과가 좋지 않아서인지 나는 그들이 그런 말을 해 두게 둔다. 바보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안고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백운대 탐방지원센터를 지나 백운봉으로 갔다. 입구는 기억이 안 나는데 백운동에서 길이 좁아 사람들이 줄을 섰던 게 기억났다. 지금도 그때와 비슷했다.
눈에 띈 것은 여자들이 혼자 산에 오른 분들이 많았다. 그들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걸음으로 느릿느릿하게, 때로는 빠르게 산에 올랐다. 나도 겉으로는 꽤 평온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남이 혼자서 산에 오른다면 이상하게 볼까 봐 걱정하는 것은 티가 나지 않도록 숨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고 남의 일까지 신경 쓸 정도로 관심도 없었다.
<백운봉에서 밑을 바라봤는데 누군가 누워 있다, 신선인듯>
혼자 여행이나 산에 가고 내 할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사는 동안 그런 것들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쟁취해서 얻은 것이다. 남의 말 한마디에 무너진 것을 보면 나도 꽤 귀가 얇고 소심하다.
나약한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나를 먼저 생각한다. 너는 이미 아이들을 잘 키웠고, 일도 잘했고, 너의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준비 중이라고 다독인다. 그러다가 또 한편으로는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떠올라 속상할 때가 있다. 두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길을 나서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무조건 안전하게 산행하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다.
오랫동안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선배에 대한 기억과 요즘 미운 마음이 드는 사람을 생각하며 걸었다. 방어기제로 회피가 있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무례하게 굴었던 사람도 생각했고, 내가 무례했던 일도 되돌아보았다.
백운동 앞에서 사회적 거리를 지키며 사람들이 모여 있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 혼자 앉아서 서울 시내를 바라봤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데 부드러웠다. 바람 맛 때문에 삼각산의 뿔처럼 날카로웠던 내 마음도 부드러워졌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게 내버려 둔 내가, 내게 무례한 행동을 했구나.’
또 그런 말을 듣게 되면 앞으로는 절대 무례하게 말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그건 실례입니다!”
내려오는 길 자꾸만 나는 그 말을 되새기며 흥얼거렸다. 역시 정상에서 맛보는 바람은 속엣것들도 시원하게 만든다. 이래서 산에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