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거림에 관한 고찰
어렸을 땐 커피를 마시는 게 왠지 어른 같아 보였다. 엄마는 늘 식사를 마치고서 믹스커피를 타마시곤 했는데 그 향기가 너무 좋았다. 한입 마시고 싶어 엄마에게 조르면 어른이 되기 전에 마시면 안된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런 금기 때문에 더 마시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믹스커피야 집에서 몰래몰래 타마셨는데 커피맛보다는 그 달달한 맛에 마셨던 것 같다. 중학교 때부터 공부를 빡시게 하는 바람에 잠을 깨야하는 날이 더러 있었지만 커피와 아이스초코 중 고를 때면 늘 아이스초코를 택했다. 커피는 가끔 즐기는 별미처럼 생각했다.
학생이 이용하기에 카페가 저렴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보니 이왕 먹을 거면 맛있는 걸 골랐다. 쓴 커피보다는 달달한 음료. 휘핑크림과 시럽이 듬뿍 뿌려진 것들을 골랐다. 지금은 그런 걸 먹으면 한 끼를 굶어도 될 정도로 배가 부른데 학생 때는 정말 열심히 잘 챙겨먹었던 거 같다. 덕분에 고등학생 때는 인생 최대 몸무게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그러다 커피를 카페인으로 인식하고 먹게 된 건 대학생때 부터였다. 극장 스태프로 일하면서 학기 중 반 이상은 밤을 새야 했다보니 맨 정신으로 깨어있는 게 불가능했다. 아메리카노를 그야말로 달고 살았다. 연극 연출을 할 때는 밥대신 카페인으로 버텼던 거 같다. 그때 당시 편의점에 1리터짜리 우유팩 같은 거에 커피를 팔았었는데 페트병에 옮겨 담아서는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모두 마셔치웠다.
커피의 맛을 즐기게 된 건 교환학생을 갔을 때의 일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이탈리아 여행을 갔을 때였다. 한국에서도 에스프레소를 마셔본 적은 없었지만 이탈리아 여행 중 원데이 투어? 같은 걸 참여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만난 언니가 이탈리아에서 에스프레소를 꼭 먹어봐야 한다며 내게 처음으로 건네줬던 것 같다. 커피는 쓴 맛으로 먹는다며 시럽도 뿌려본 적이 없는데 에스프레소에는 설탕을 쳐서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게 마셔본 커피는 달콤 쌉쌀한 맛이 났다. 지나치게 달지도 지나치게 쓰지도 않은 부드러운 맛이었다. 여행지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고 있으니 그 향과 맛이 온전히 느껴졌다. 이탈리아에서뿐만 아니라 교환학생으로 머무는 동안 종종 에스프레소를 사마셨다. 단조로운 맛의 커피만 좋아하던 내가 어느 순간 부터는 산미가 있는 좀 더 풍부한 맛의 커피를 좋아하게 됐다.
공황장애를 처음 겪은 건 대학교 3학년때의 일이지만 본격적으로 만성적인 불안장애가 시작된 건 교환학생을 다녀온 이후였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심하게 앓았다. 기본적인 우울을 탑재한 상태로 늘 불안에 떨며 살았다. 괜찮아졌다 싶다가도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리거나 과하게 뛰면 나는 늘 불안장애를 떠올렸다. 불안장애가 무서워 심장이 뛸 만한 상황을 극도로 억제했다.
그중 하나가 카페인이다. 불안장애 약을 몇 번 타먹기 시작하면서 커피는 한때 좋아했지만 먹을 수 없는 금기의 음료가 되어버렸다. 어른이 되면 마실 수 있다 생각했던 커피는 막상 어른이 되어버리자 마실 수 없었다.
물론 커피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마시고 싶다면 디카페인으로 즐기곤 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그 맛을 알게 됐는데 디카페인으로 마시는 커피는 어딘가 단조로웠다. 맛이 심심했다. 어쩌면 이것도 내가 카페인을 마실 수 없다보니 그 금기의 맛보다 덜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커피가 허락되는 순간은 다시 카페인이 필요한 순간으로만 제한됐다. 부득이하게 밤을 새야하거나 일 때문에 아침에라도 억지로 잠을 깨워야 할 때에만 커피를 마셨다. 그렇다해도 컨디션이 안좋은 날이면 내가 언제 어디서 카페인으로 인한 불안장애를 느낄지 모르기 때문에 상태를 봐가면서 조심조심 마셔야만 했다.
그랬던 내가 며칠 전 커피를 마셨다. 춤을 배우러 가기 몇 시간 전이었다. 너무 먹고 싶던 디저트를 사 온 상황이었는데 마침 냉장고엔 리뷰 이벤트로 받았던 아메리카노가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 차를 끓여서 마셨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날은 괜찮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졸립기도 해서 춤 배우러 가기 전 잠도 깨고 텐션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마시게 됐다.
오랜만에 카페인이 들어있는 커피를 마시니 황홀할 정도였다. 내가 좋아하는 약간 산미가 도는 커피였어서 그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이걸 마시고 이따가 심장이 너무 뛰면 어쩌지, 밤에 잠 못자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일단은 이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작년, 많은 사건사고를 해결하면서 불안장애는 사그라들었다. 완치됐냐고 묻는다면 나도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사고방식에 있어서 많이 변화가 있었다고는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안도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춤을 추러 가기 전부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카페인의 영향인 거 같았다. 하지만 어디로 갈지 정해져 있었기 덕분일까. 심장이 뛴다는 게 무섭지 않았다. 새로운 걸 배우러 간다는 사실에 대한 설렘, 기분 좋은 떨림으로 느껴졌다. 내게 그 기분은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심장 뛰는 걸 두려워한다는 건 사실 꽤나 귀찮은 일이다. 달리기만 해도 심장이 뛰는데 그 일상적인 순간을 불안해하니 기분 좋은 일, 당황스러운 일, 설레는 일 그 모든 걸 나는 공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근거리는 일에는 저마다 다른 감정의 이름이 붙어있을 게 분명했다. 오랜만에 두근거림이 공포가 아닌 설렘으로 돌아왔다. 사람다움을 회복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배우러 간 원데이 클래스에선 여전히 몸을 뚝딱거렸지만 열심히 리듬도 타보고 내 페이스를 유지하며 걸스힙합을 배웠다.
여전히 난 카페인을 겁내지만 조금씩 시도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되찾아올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그 정도는 감수해볼 만하다는 마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