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럼주의라는 글자를 보면 꼭 넘어져야할 것 같다

쓸모없는 초능력 일기 15.

by 김라면


출근을 위해 나선 윤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 눈이다. 녹았다고 안심할쯤에 다시 눈이 내렸고, 괜찮을쯤에 다시 폭닥하게 쌓이고, 다시 또 얼어붙었다.

윤주의 집 앞은 더할나위없는 내리막이라, ‘미끄럼주의’라는 팻말이 대문짝만하게 붙어있었다. 그럼에도 꽈당, 하고 크게 자빠지는 일을 면치 못하는 사람도 스케이트 타듯 위태롭고도 아찔하게 내려가는 사람은 매일같이 존재했다.


새벽 다섯 시.


아직 길을 오가는 사람이 적은 시간이다. 이 시간이면 넘어져도 보고 있을 사람 하나 없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혼자 넘어지고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 아니, 차라리 그냥 넘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딛는다. 아직 괜찮다. 얼음과 거리가 있다. 약간의 물기어린 아스팔트가 조심히 내딛은 신발 밑창을 맞이한다. 미끄러운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아직도 괜찮다. 어쩌면 오늘은 조금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자만한 채 발을 내딛자 금방 다리가 죽- 미끄러진다. 윤주는 다리를 끌어당겨 반듯하게 선 채 괜히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주변을 살핀다. 아무도 없다. 그래, 이 새벽녘에 누군가가 있을리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평범하게 걷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선다.


다리를 뻗고 바닥에 딛는다. 반대쪽도 반복한다. 뭐야, 괜찮잖아—.


도르르—.

“어, 거기—.”


정체를 모를 소리와 누군가의 목소리에 윤주는 내딛던 다리를 푹신한 눈 위로 성급하게 내려놓는다. 쌓여있던 눈은 발을 잡아줄 생각이 전혀없었는지, 무방비한 다리가 앞으로 쭉 미끄러짐과 동시에 중심이 흐트러진다. 반대쪽 다리마저 휘청거리며 아스팔트가 아닌 얼음바닥을 짚고, 이내 두 다리는 제멋대로 휘청거리다 윤주를 뒷걸음질치게 만든다. 춤추듯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두 다리를 어찌할 바 없이 내버려둔 채 내리막길을 미끄러지다가 겨우 두 팔을 벌려 균형을 잡는다.


쓸없능. 쓸모없는 초능력을 누구나 하나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

윤주의 초능력은 미끄러질만한 곳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잡는 능력이었다.


두 다리는 이미 스트레칭을 하듯 앞 뒤로 쭉 벌어져 있었고, 두 팔은 수평으로 뻗었으니 이걸 미끄러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며가며 편의점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이 눈길 위에 양말도 없이 슬리퍼만 신은 남자가 배를 부여잡고 웃고 있었다.


아, 젠장.


하하하하하하—. 아, 진짜, 미안. 하하하하—.


남자가 슬리퍼를 신은채 다가와 윤주의 옆에 굴러떨어진 캔을 주워든다.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오른손을 꺼내더니 주먹을 쥔다. 그리고 엄지를 슥 올린다.


“나이스 모닝 쇼.”


젠장. 차라리 얌전히 꽈당-하고 넘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윤주는 옷을 털며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두 세번은 더 미끄러질뻔 했지만,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면서 그렇게 걸었다.


<끝.>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14화다람쥐도 맛있는 도토리 정도는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