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속도

스며든 계절

by 녕이담

그렇게나 죽일 듯이 타오르던 여름도 드디어 꺾였다.


며칠 사이 성큼 소리도, 어떤 전환의 알림도 없이 스며든 차가운 공기가 이젠 자신의 차례라며 스르륵 스며 들어온다.

낮에는 가을의 뙤약볕이 여름의 기운을 넘겨받고 본분을 다 하고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에 사람들의 옷차림에 변화가 생겨났다.


지하철에 앉아 사람들을 둘러보면 물드는 가을처럼 그들의 옷차림도 가을의 물이 들기 시작했다.

색의 배치와 디자인, 스타일을 보며 가을이란 것을 알게 된다.


원래 가을은 내가 좋아하는 계절의 시기이기도 하다.


숨 막히게 너덜너덜 기운이 소진되는 여름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이 시원한 바람. 알록달록 노랗게 노랗게 발갛게 빨갛게 물드는 세상은 아름답고 새파랗게 높아진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을 차지할지 모를 짧은 계절이 코끝에 닿는 시원한 바람으로 숨통을 트여준다.


걷기 좋은 계절.

비가 오던 퇴근길. 괜스레 평소에는 가지 않던 방향으로 한번 걸어가기로 했다. 걸음을 옮기며 처음으로 율곡터널로 들어서자 넘어가 구부러져 있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길이 보인다.


근래에 줄어든 체력에 발걸음은 느리고, 호흡은 가쁘며, 심장은 방망이질로 상태를 알려왔지만 묵묵히 긴 터널을 지나갔다.

실제로는 그리 길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알지만 잠시 동안 '이 길이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란 생각이 스쳐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잠시 앉아 쉴까 싶기도 했다.

투명한 창문을 사이에 두고 너머로 보이는 차들 중에 평소 타고 다니는 버스가 보인다. 불과 오전에도 타고 갔던 버스는 단 1분도 안 돼 지나온 터널을 나의 걸음으론 이토록 더디게 가고 있었다.


손에 쥔 우산과 구부러진 터널 입구 구간으로 접어들자 습하고 차가운 비냄새가 먼저 느껴졌다. 입구로 다다르니 다시 만난 비가 내리는 젖은 세상이 나를 반겨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우산을 펼치고 비를 막으며 천천히 서순라길로 발을 옮겼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물이 뽐내는 듯한 아우성이 헤드폰을 뚫고 들어왔지만 거리를 유유히 걸어갔다.


비가 오는 이런 날에도 카페와 식당, 바에는 사람들이 꽤나 자리하고 있었다. 선선한 가을비를 감상하며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보니 나도 그들처럼 그런 시간을 보내고 갈까 잠시 고민하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여유는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을 때 가지기에는 어려운 것이라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지' 아무도 묻지 않은 말을 중얼대며 서순라길을 지나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매번 비슷한 모양새로 살아가다가 이따금씩 작은 일탈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 때가 있다.


가을이 스며든 계절은 내게 매년 그런 욕구를 선사해 주는 계절로 찾아와 주는 것 같다.

악동 같은 미소처럼 씨익 웃는 얼굴에 바람이 스치고 간다.


이번 가을에는 어떤 일탈을 해볼까?


화,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