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소중함 - 이송
병원생활은 쉽지 않았다. 나름 변두리에서 큰 정형외과 병원이지만 오래된 시설이라 병원 내에서 휠체어를 타야 하는 나에게는 장애물이 많았다. 지나가다가 보게 된 8인실 병동의 침대는 빽빽하게 붙어있어 마치 닭장과도 같았다. 그나마 4인실에 있는 내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내 멀쩡한 사람은 의사와 간호사 밖에 없었다.
시설도 시설이지만 공공의식이 없는 옆자리 아저씨는 사고로 예민해져 있는 나를 더욱 자극하였다. 아저씨는 산에서 나무를 베다가 그 나무가 자기 쪽으로 스러져 정강이가 골절되는 사고로 병원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아저씨의 면회객들이 오면 항상 시끄러웠다. 바로 옆에서 소리 지르는 듯 시끄럽게 몇 시간씩 떠들고 가곤 하였다. 한 시간이 넘게 시끄러운 소리를 듣게 되는 날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것들은 앞으로 다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예측 할 수 없는 감정과 섞여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발을 땅에 디딜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불편한 것은 화장실 갈 때와 씻을 때였다. 이 모든 것을 아빠가 대신해 주셨다. 화장실 갈 때 나를 방해했던 좁은 문과 문턱은 아버지 덕분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3일에 한번 머리 감겨주기, 끼니때마다 병원밥 치워주기 등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모두 대신해 주셨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가족 밖에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같이 놀러 갔던 친구들은 면회 한번 오지 않았다. 좀 서운 했긴 했지만 그때의 나는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샤워를 할 수없어 꼴이 말이 아니었고, 누가 병원에 와서 위로하는 것이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 것 같았다.
응급수술 후 본 수술을 기다리며 아무래도 중요한 수술이라고 생각하니 최고의 병원에서 하고 싶었다. 어차피 움직일 수 없으니 침대에 누워서 족부 관련 병원을 찾아보았다. 대학병원은 누나가 알아보았는데 몇 달씩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부기가 빠지면 바로 수술을 해야 하는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개인병원 중 족부 쪽으로 유명한 병원들을 찾아보았다. 대부분의 병원의 웹사이트에는 상담을 할 수 있는 게시판이 있었다. 나는 미리 찍어둔 나의 수술 부위 엑스레이 사진과 자세한 설명을 첨부해 궁금한 점들을 남겼다.
몇몇 곳에서는 기존에 병원에서 하라는 말도이 있었고,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모든 기록들을 가지고 내원해서 상담을 받으라는 말만 있었다. 심지어 개인 병원임에도 불구하고 몇 달씩 수술 예약이 꽉 차 있는 곳도 있었다. 지금 있는 병원에서의 수술날짜가 얼마 안 남은 상태라 하루라도 빨리 결정해야 했다. 할 수없이 내가 움 직일 수 없기 때문에 누나와 아빠가 모든 기록들을 가지고 한 족부 전문 정형외과 병원을 다녀왔다. 그쪽 병원의 의사 선생님의 나의 상태에 대한 의견은 지금 내가 있는 병원의 선생님과 같았지만 좀 더 희망적인 소견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병원으로 옮겨서 수술을 받아도 된다고 했다.
개원 한지는 얼마 안 된 개인 병원이지만 족부만 전문적으로 한다는 것과 최신시설을 갖추었다는 것 그리고 좀 더 희망적인 소견이 있다는 것들을 바탕으로 병원을 옮겨서 수술을 받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나를 처음 응급수술 해주신 의사 선생님께 약간의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한 번의 기회로 나의 일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선을 선택하고 싶었다.
새로 입원할 병원은 서울 중심에 있기 때문에 지금의 병원과 꽤 거리가 있었다. 내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고 이송할 때 수술한 다리의 충격을 최소화해야 했다. 우리 가족은 나를 이송하기 위해 사설 구급차를 불렀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송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