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깨밭 고랑에서 길심씨와 하늘과 땅과 바람과 구름과 소나무와 회동 중이다. 오늘 길심씨의 무기는 호미요, 나의 무기는 물주전자이다. 길심씨가 밭고랑에 앉았는데 내가 어찌 따라나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시 세끼 챙기고 길심씨 꽁무니 따라다니기 힘들다.
길심씨는 들깨 씨가 촘촘하게 난 곳에서 모종을 뽑아다가 드물게 난 곳에, 나지 않는 곳에 옮겨 심는다. 밭 옆에는 영산강 수로가 지나간다. 나는 수로에 엎드려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담아서는 모종에 물을 준다. 벌써 며칠째 아침저녁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 씨뿌리고, 풀 매고, 옮겨 심고, 가뭄에 물 주고... 들깨 키우는데 이렇게 많은 손길이 갈 줄이야.
요즘 역대급 폭염이라 가뭄이 더 심하다. 흙이 뜨겁다. 물을 주고 있는데 갑자기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아야, 아야, 얼릉얼릉 집에 고추 들여놔야제."
나는 집으로 뛰어가 마당에 널어 놓은 고추를 들여놓고 다시 밭으로 왔다.
"엄마, 비가 올 것 같은데 물을 줘야 하나? 이렇게 물을 줬는데 비 오면 억울하잖아"
하니 길심씨가
"그래도 그 공은 어디 안가겄제."
한다. 그래 맞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비가 올 때 오더라도 주던 물은 줘야지. 어느새 몇 방울 떨어지던 비는 금세 그쳤다. 해가 슬며시 얼굴을 내밀고 기온이 훅 올라간다. 옮겨 심은 모종은 온몸을 축 늘어뜨리고 흙에 배를 깔았다. 이주 몸살을 이겨내고 몸을 곧추세울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길심씨가 엉덩이를 떼어 옮겨가며
"칠 년 가뭄에도 어느 날 비 안 온 날 없고, 석 달 장마에도 어느 날 볕 안 난 날 없다더라."
"엄마,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갑자기 깨달음이 온다. 남편이 무리한 사업으로 4년 동안 컴컴한 터널을 지날 때도 그 속에 언뜻언뜻 기쁨과 행복은 있었다. 지나고 보니 말이다. 그 속에 있을 때는 모르고 지나고 보면 안다. 그 속에 있을 때 알아보고 즐기면 좋으련만...
"이 비가 한 방울인 거 같아도 이것들한테는 금방울이여."밭고랑에 앉아 길심씨의 어록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