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

길심씨네서(16일째)

by 전난희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 나는 지금 내 고향 영암, 호동 마을 길심씨네서 시골살이 20여 일째다. 나이 80이 되어도 한시도 농사 일과 세끼 밥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길심씨를 보며 호복하게 삼시 세끼 따뜻한 밥을 지어 드리고 싶었다. 대단한 거사라도 된 듯 마음만 먹고 벼르고 있던 일이 그 때가 된 듯 자연스레 찾아왔다.


그나마 부모님이 활동 가능할 때 함께 할 수 있어 살며, 사랑하며, 일하며, 여행하며 추억을 쌓고 있다. 너무 늦어 때를 놓치고 나서 후회하게 될까 봐 효도를 한답시고 시골살이 중이만 따지고 보면 나를 위한 일이다. 부모님은 한없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길심씨와 함께 하는 밭고랑에도 우리네 삶이 그대로 들어 있다. 때를 알고 때를 지키는 일을 자연에서 배운다.


어머니는 밭고랑, 논고랑에서만 반 백 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는 워커홀릭이다. 그 속에서 스스로 터득한 철학이 있다. 들깨 모종을 옮겨 심는 길심씨에게

"엄마, 이런 가뭄에 옮겨 심으면 살겄어? 비 온 뒤에 심어야 되지 않을까?"

"아이고, 즈그들도 이제 곧 꽃 필 연구를 하고 있는디 너무 늦게 옮겨 심으면 몸살하느라 꽃이 못 피제."

"이렇게 가물어도 다 때가 있응께 워쩌겄어."


밭에는 길심씨를 바라보고 때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가득하다. 때를 맞춰 심고, 매고, 거둬들여야 한다. 녹두는 꼬투리가 녹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했다. 따야 한다. 오래 두면 톡톡 튀어 나간다. 고추도 초록에서 검붉어지며 붉은색으로 변하고 있다. 때맞춰 따주지 않으면 물커지고, 떨어지면 가치를 잃고 만다. 그래서 길심씨는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때를 알고 때를 맞추는 것은 쉽지 않다.

일을 할 수 없는 한낮엔 길심씨는 거의 매일 마을회관 정자로 마실을 간다. 제비가 먹이를 물어다 새끼 입에 넣어주듯 동네 소식을 물어다 아버지에게 전한다. 동네 어르신 중에 남자분들은 돌아가시고 몇 분 안 계신다. 남자들의 평균수명이 여자들에 비해 짧다는 걸 증명한다. 그래서 마을회관은 여자분들, 아짐들 차지다. 한때는 남자분들이 차지하던 때도 있었다. 때는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간다.

성수씨와 길심씨는 새벽에 들로 나가 한나절 일을 하고 들어온다. 때(끼니)를 잘 맞춰 들어오는 성수씨에 비해 길심씨는 누군가를 만나서, 오다가도 자꾸만 보이는 풀을 포기할 수 없어서, 마당에 들어서서도 흐트러진 무언가를 정리하기 위해서 때를 맞추지 못한다. 길심씨의 특기다. 아버지와 나는 길심씨에게 폭풍 잔소리에 화까지 내보지만 고쳐지지 않는다.


농사에서의 때는 잘 맞추지만 끼니의 때는 잘 맞추지 않는 길심씨를 어이 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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