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집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 밖의 천장에 매달린 바꾸리(바구니)를 보고 물었더니 길심씨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옛날에 쌀이 귀할 때 보리쌀 삶아서 여그다 퍼놓고 이렇게 걸어놨제. 밥할때는 바꾸리 내려서 그 보리밥 푹 떠서 솥밑에다 깔고는 쌀은 그 우에 한 자밤이나 올리고 밥을 했제."
"맞어. 나도 생각나네."
나는 내친김에 길심씨의 기억을 더듬어 집안 여기저기 방치되어 먼지 낀 혼수품을 찾아 모았다. 내가 먼지를 털어내고 깨끗이 닦아내는 동안 엄마는 살림살이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을 풀어낸다. 길심씨의 60여 년 지기를 살피다 보니 새록새록 정답고 내 유년시절 그들이 자리했던 곳의 풍경과 그 쓰임새가 보이는 듯하다. 그 시절, 혼수로 해 온 것들이 동네에선 귀해서 대접받았던 것도 있다. 60년 전 그때도 서울 등 도회지에서는 볼품없는 것들이었을지 몰라도 말이다.
그중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정물화 액자이다. 그 시절에, 지금으로 따지면 인테리어 액자를 혼수로 해오다니. 길심씨의 친정, 나의 외가는 꽤나 잘 사는 집이었더랬다. 40여 년 전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읍내에서 외할아버지를 만났다. 중절모를 쓰고 구두를 신고 하얀 린넨셔츠에 날이 바짝 선 진회색 바지를 입고 멋으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웃는 모습에 잘 생기고 키 큰 노신사는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멋들어졌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고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외가에서 부자로 잘 살았던 길심씨는 전씨가 양반이라고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왔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어머니는 잘 먹고, 잘 입고 살아서인지 음식 솜씨도 바느질 솜씨도 좋았다. 친정에서 혼수로 해온 말총으로 만든 체로 술지게미 걸러 술을 빚고, 메밀가루 걸러 메밀묵 만들고, 엿기름 걸러 식혜를 만들었다. 이제는 편리해진 생활 도구와 인스턴트식품으로 할 일을 잃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창고 벽에 걸려 있다.
체는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밭거나 거르는데 쓰는 도구. 얇은 나무나 널빤지로 만든 쳇바퀴에 말총, 명주실, 철사 따위로 그물 모양의 쳇불을 씌워 나무못이나 대못을 박아 고정하여 만든다. <네이버 어학사전>
" 엄마, 이 은색 양은 다라이(대야)는 어디다 많이 썼는가?"
"그때는 고무다라도 없고 이런 양은 다라는 귀해서 인기가 좋았제. 엄마가 제금나고(분가하고) 나서 느그 할머니네서 많이 빌려갔제. 장에 머리에 이고 감 팔러 갈 때 바구니에 가져가면 깨지고 터져서 감물이 흐르면 징하제."
"아~, 그렇네잉.""그라고 느그 할아버지가 한봉을 하다 보니 청(꿀)을 딸 때면 빌려갔제. 어느 날 너를 맡겨놨다 젖을 먹이러 가서 보니 이 다라에 청을 가득 따놨더라. 그래서 몰래 2숟가락을 퍼먹었다. 흐흑. 그때는 먹을 것이 귀했제."
"내가 혼수품을 많이 해온 폭이제. 느그 큰 당숙모가 각시 굿 보고 가서는 내가 농지기(장롱에 들어갈 옷)는 동네에서 제일 많이 해왔다고 그랬다등만. 옷 담아온 고리짝문이 방방했응께."
오래된 60년지기 혼수품이 낡고, 신문물의 등장으로 진즉에 제 할 일을 잃었다. 길심씨의 몸도 혼수품처럼 낡아져 허리가 굽고 햇빛에 그을린 검은 얼굴엔 주름이 깊은 골짜기를 이루었다. 팔다리 피부도 늘어지고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할 일은 끝이 없다. 논과 밭에서는 작물들이 그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고, 집에서는 성수씨가 길심씨의 손맛을 늘 기다리고 있다. 자식들은 또 어떤가? 같은 60년지기지만 급이 다르다.